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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May 27. 2024

마침내 만난 '박찬욱의 몽타주'

박찬욱 산문집, 마음산책 (2005)


요즘 머릿속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 지하철역에 있는 스마트 도서관을 찾곤 한다. 변덕이 있는 편인데, 요행을 바라는 심보는 심지 굳게 유지하고 있다.


막연하게 발 닿은 곳에서 우연히! 운명처럼! 팔자 피게 할 구세주를 맞닥뜨리는 '비포 선라이즈'적 소망. 소녀 감성 소유자로서 가슴 한편엔 럭키비키를 위한 이부자리를 늘 펴놓고 있다.


하지만 요행 없는 팔자라는 건 내가 장원영이 아니라는 것만큼 명확히 알고 있기에 큰 기대는 없다. 바라는 건, 목적 없이 간 스마트 도서관에서 잘 쓴 책 한 권 만나기를, 정도다.


그리고 만났다. 무심한 하늘은 이리도 소박한 소원만 이뤄준다. 에라이, 감사합니다. 헤헤.


박찬욱 영화감독의 산문집 '박찬욱의 몽타주'를 빌렸다. 2005년 책인데 20년 만에 읽은 셈이다.


왜 안 읽었지? 생각해 보면 딱히 읽을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감독의 책을 읽은 것이 처음이다.

왜 안 읽었지? 또 생각해 보았으나 역시 읽을 일이 없었다.

역시 취미 없는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씨네필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수다를 떠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영미다. 애인인 류에게 유괴라는 범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혼자 영화 전체 대사의 절반을 읊조리고 있다. 게다가 또 이 대사의 절반은 거의 무의미하다. 방금 한 말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긴가. 그건 그녀 자신조차도 이 범죄의 정당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꾸, 강박적으로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한다는 말이다. 이럴 때 대사는 어떤 내용을 ‘전달’한다기보다는 심정을 ‘표현’한다.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말하는지가 중요한 경우다. 말하는 ‘스타일’로 말하는 것이다.

- 131쪽 <복수는 나의 것>에 관한 글 중에서


박찬욱 감독의 산문집에 관해 쓴 내용보다 군더더기가 길었던 건 바로 위의 이유 때문이다.


그건 나 자신조차도 이 감상문의 정당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만에 만난 명문으로 가득 찬 책을 두고 이런 일기스러운 글을 남겨도 되는 건가.


인터넷 세상에 데이터 쓰레기를 투척해 공연히 데이터 센터만 더 짓게 하고 AI에게 잘못된 정보값을 학습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괜찮다. AI는 박찬욱 감독의 좋은 문체, 개성 있는 스타일도 학습할 거다.


읽다가 킥킥 댈 정도의 유머감각, 깐느박의 시선이라는 내용, 유려한 문장과 구성까지.


'첫째도 개성, 둘째도 개성, 무엇보다도 오직 개성.'이라는 책의 머리말처럼 그 일성을 이 책 303쪽에 걸쳐 이룩하고 계시기도 하다.


글 잘 쓰신다. 왜 몰랐지?

이제는 안다, 마침내.


한 줄 평 :

박찬욱 감독을 좋아한다면, 씨네필이라면, 잘 쓴 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몽타주를 따라 그의 글 조각을 이어 붙여보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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