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SBS <우리영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싶을 때가 있다. 깜깜한 조명 아래 오직 스크린만이 빛나는 곳. 영화의 소리만이 들리는 곳. 오롯이 한 곳에 집중하고 싶어질 때 그렇다. 시각과 청각의 몰입이 이뤄지는 순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시시각각 올라오는 정보들에 정신이 분산되는 요즘은 그런 경험이 귀하다. 감각의 몰입도 그렇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겪는 일생일대의 순간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어쩌면 체험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영화를 본 뒤 한 작품을 통과한 체험기를 써보자, 라고 매번 다짐해도 못/안 지키는 나라는 사람. 그 반대쪽엔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라는 책을 낸 김중혁 작가가 있다. 감상한 영화를 둘러싸고 써내려간 이야기들은 그의 성실한 기록이다.
언제나 다짐은 가벼워서 책을 덮은 뒤 따라서 뭐라도 써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영화관에 가지 않는 요즘이다. 대신 제목에 ‘영화’가 들어가고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나오는 SBS 드라마 <우리영화>를 꺼내본다.
영화는 아니지만 최근 본 드라마 중에서 연출적으로 색다른 시도를 하는 작품이어서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 영화감독과 배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KBS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과 유사하나 직업적인 요소보다는 주인공인 배우의 설정에서 비롯한 드라마가 구심점인 작품이다. 시한부 설정의 주인공이 등장하기에 삶과 영화, 그 사이의 사랑까지 저울추를 오가며 스토리가 흘러간다.
<우리영화>의 미덕은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영화적인 기법을 프라임타임 지상파 드라마에 녹여 연출한다는 점이다. 방송 산업의 위기를 몸소 느끼는 만큼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모험을 함께하는 것만 같다. TV 매체에 나오는 이 작품 자체에 몰입하고, 이를 만든 제작진의 마음을 짐작해보며 감정 이입하고 있다랄까.
물론 이러한 감상은 작품 내재적인 요소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주연배우들이 마주한 결정적인 신을 무성영화처럼 연출한다든지, 주연배우가 찍은 VHS 화질의 화면을 해석의 공간 혹은 환기의 순간으로서 삽입한다든지 하는 장면이 그렇다.
생소한 걸 선호하지 않는 대중매체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니. 갈수록 어려워지는 방송국 제작 환경에서 낯설고 어려울 수도 있는 연출을 가미하다니. <우리영화> 혹은 '우리 영화'를 향한 등장 인물들 혹은 실제 제작진의 밀도를 어림 짐작해보며 괜히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4회차까지 방송된 지금(2주 전에 쓴 글이다), 아쉽게도 <우리영화>의 시청률은 3~4%에 머무르고 있다. 각종 연예 기사에선 낮은 시청률을 꼬집었고 특정 매체와 배우의 신경전도 화제가 되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건, 김중혁 작가가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남긴 글귀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자포자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응원이다. 예술가는 딱 한사람이라도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성장할 수 있다.
p. 357, 김중혁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안온북스(2024)
그렇다. 나는 <우리영화>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다. 시한부 설정, 캐릭터, 연기, 관계성 등등 그 모든 게 꼭 맘에 든다고 할 순 없지만 흔치 않은 시도를 한 이 작품을 높이 산다. 제작비 절감을 넘어 제작비를 확보해야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악화되는 방송 환경에서 결국 해낸 창작자들의 시도를 존중한다. 방송쟁이들은 예술보다는 장사를 해야 하는 위치이지만 창작의 이상은 예술을 향하는 것 아니겠는가.
제작비 구조가 어떤지 모르겠으나, 시청률만 보면 다시 이런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작품에 자신 있어 한 남궁민 배우든 연출이든 작가든 누구에게든 잘 보고 있다고, 이렇게 오랜만에 글도 쓰고 싶어졌다고 전해본다. 충분히 멋있다구요.
[탑건 : 매버릭]
우리는 때로 무모하다 싶은 일에 도전하는 경우가 있다. 편한 길이 있는데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편법이 있는데도 정도를 갈 때가 있다. 성장하고 싶을 때, 스스로 정했던 테두리를 훌쩍 뛰어넘고 싶을 때,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을 때 그런 선택을 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매버릭의 상사는 충고한다.
“곧 무인기가 보급되면 파일럿의 시대는 끝날 거야. 자네 자리는 없어질 거야.”
매버릭은 문을 나서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수많은 영화 팬이 이 대사에 오열했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안 같은 대사였다. 그래,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어.
우리는 모두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촬영하듯 스턴트맨 없이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중이다.
p.425, 김중혁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안온북스(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