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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혜 Jun 02. 2021

유네스코가 말하는 여성과 ICT (1)

시리(Siri)가 왜 얼굴을 붉혀야 하나요?

살다 보면 가끔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줄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엄마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고(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인 줄 알았다), 앞구르기 하면서 봐도 평지만 펼쳐져 있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초등학교에서 처음 배웠을 때도 충격적이었다(그렇다고 지금 지구 평면설을 믿진 않는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입사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발간된 유네스코 보고서 “할 수만 있다면, 얼굴을 붉혔을 거예요(I’d Blush If I Could)”를 읽었을 때였다. 보고서 제목이 예사롭지 않아 나름 신입사원의 패기로 업무 외 시간에 읽어보겠다며 다운받아 두었는데, 보고서의 제목이기도 한 저 대사는 무려 2010년도 초반 아이폰에 탑재된 인공지능 비서 기능인 시리(Siri)가 사용자의 모욕적인 음성 메시지에 대한 응답으로 송출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대사였다고 한다.


남녀 간 디지털 역량 차이를 다룬 유네스코 보고서 (c) UNESCO


모욕적인 언사에 대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답변이, 그것도 여성의 목소리로, 얼굴을 붉혔을 거라니? 애플처럼 힙하고 선도적인 회사에서 이렇게 후지고 여성혐오적인 프로그래밍을 거리낌 없이 내놓았다니 배신감이 차올랐다. 여기서 1차 충격을 받고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 보았는데, 시리나 빅스비 같은 인공지능 비서 서비스, 내비게이션 등 제품의 음성 보조 서비스들이 거의 대부분 여성의 목소리를 차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성차별적인 사회 인식을 부추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게? 왜 시리나 내비게이션, 하물며 공공기관이나 은행 ARS 음성까지도 왜 죄다 여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정말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2차 충격을 받았다. (참고: 시리는 저 논란 이후 업데이트되어 더 이상 저런 답변을 송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게? 왜 시리나 내비게이션, 하물며 공공기관이나
은행 ARS 음성까지도 왜 죄다 여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왜 우리는 기술에까지 이런 여성혐오적인 양상을 입히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 보고서를 통해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으로 남성에 비해 여성의 ‘디지털 역량’(digital skill)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실에서부터 이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정의하는 디지털 역량이란, “사회경제적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안전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디지털 기기와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해 정보에 접근하고, 관리하며, 이해하고, 통합하고, 소통하고, 그 정보를 평가하고 정보를 생성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정의가 매우 길고 복잡한데, 유네스코는 이 개념이 단순히 기기의 사용법을 익히고 간단한 검색을 하는 능력부터 직업적으로 특수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거나 데이터를 해석하는 능력까지의 연속체(continuum)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디지털 역량을 보유하고 향유하는 능력에서 남성과 여성 간 격차가 꾸준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엑셀에서 단순한 계산을 하는 정도의 디지털 스킬만 놓고 봐도 여성이 남성보다 이 작업을 해낼 가능성은 25% 정도 낮게 평가됐으며, 기술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코딩 등) 성별 간 능력의 격차는 더욱 커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격차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따르면, 2013-2017년 사이 남녀 간 인터넷 보급률 격차는 11%에서 11.6%로 증가했고, EU와 미국에서 모두 ICT 관련 전공자 중 여성의 비율은 꾸준히 하락해 왔다.


디지털 역량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성별 간 역량 격차는 커지고 있다. (c) UNESCO


유네스코에 따르면 이러한 디지털 젠더 격차(digital gender gap)의 주요 원인은 ‘역량 격차’이다. 즉, IT 기술이 발달해 가격이 싸지고 더 널리 상용화가 되면 IT 기술의 혜택이 남녀 모두에게 균등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휴대폰 같은 IT 기기를 가지고 있어도 그 기기를 활용해 더 고차원적인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의 정도에서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디지털 젠더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것이었다. 실제로 중저소득국 10개국에서 수행된 연구에 따르면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인터넷을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경우는 여성이 남성보다 1.6배 가량 많다고 한다. 인도 시골 지역 여성들은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는 방법만 알 뿐,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읽는 등의 작업은 남편의 도움이 있어야만 해낼 수 있었다. 인도에서만 이럴까? 전 세계 도시들을 조사해봐도 인터넷을 통해 구직 활동을 할 확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25% 적었고, 최첨단 기술의 얼리 어답터는 대부분 남성이며, 머신러닝 같은 최첨단 업계에서조차 머신러닝 연구원의 12%만이 여성이라고 한다. 통계를 들고 오자면 끝도 없지만, 모두들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여성은 남성보다 디지털 역량이 떨어지는 걸까? 유네스코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국가 및 지역사회 차원에서 남성이 사회 전반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일수록 여성이 ICT 역량을 습득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우선 뭔가를 배우러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가정 내 경제적 권한은 남성이 쥐고 있다. 이들은 “여자애가 무슨 학교냐"라는 말로 여성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 사회적 환경이 여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학교에 여자 화장실이 미비하다거나, 등하굣길에 여성 대상 범죄가 빈번하다면 돈과 의지가 있어도 학교에 갈 수가 없다. 여성이 휴대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를 소유하고 있으면 물리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2021년의 이야기이다.

도대체 왜 여성은 남성보다 디지털 역량이 떨어지는 걸까?
유네스코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 세계적으로 2차 세계대전 직후, 즉 남성과 여성이 모두 컴퓨터에 관한 경험이 전무했을 초창기에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은 주로 ‘여성의 분야'라는 인식이 강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 나온 것처럼, 남성보다 꼼꼼하고 업무 지시를 잘 따른다는 이유로 초창기 컴퓨터 산업에는 여성, 특히 유색인종의 여성이 많이 고용되었다. 그런데 컴퓨터가 상용화되고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성차별적 편견에 따라 부모들은 남아들에게 컴퓨터를 더 많이 사주기 시작했고, 아버지들 역시 딸보다는 아들에게 컴퓨터 관련 지식을 가르쳐주곤 했다. 유년기의 이러한 경험은 여아들에게 “나는 ICT 분야에 적합하지 않아"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에서의 전공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영감이 된 NASA의 여성 수학자들 (c) NASA


이러한 성차별적 편견의 영향은 우리 머릿속에서 현실도 덮어버릴 만큼 엄청나다. 국제적으로 개인의 컴퓨터 및 정보 리터러시 역량은 ICILS라는 시험을 통해 수치화될 수 있는데, 최근 21개국에서 진행된 ICILS 시험 결과에 따르면 여아의 ICT 역량은 남아와 같거나 남아보다 월등히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아들의 고급 ICT 기술에 대한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즉, 실제가 아닌 자기가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능력)은 모든 국가에서 남아에 비해 떨어졌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는 여성이 남성에 뒤처지지 않는 역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편견과 각종 제약 때문에 여아들은 자신이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여아의 일생동안 꾸준히 유지되어 그들이 ICT 관련 전공을 선택하지 않거나 관련 업계에 진출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 결과 ICT 관련 전공 전반에서는 그 어느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심각한 성별 불균형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아들은 더 우수한 컴퓨터 능력 시험 점수를 기록했지만 자신들의 역량에 대한 자기효능감은 매우 낮았다. (c) UNESCO


오늘날 우리 일상은 ICT를 빼고 논할 수 없을 만큼 디지털 역량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상기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ICT 관련 업계에서 여성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다. 이는 성평등 분야에서 선진적이라고 여겨지는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북유럽 국가도 예외가 아닐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ITU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및 소프트웨어 개발자 중 단 6%만이 여성이라고 한다. ICT 업계에 종사하더라도 여성은 고위직까지 올라가기가 매우 힘들고, 급여가 낮은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디지털 업계가 빠르게 성장하고 많은 직종이 디지털 역량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이러한 불균형은 남녀 간 임금 격차를 더 벌려놓는 원인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지속적이고 공격적인 정책적 개입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보고서를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꽤 오래 지속됐다. 아이폰 개발자 회의에 여성이 충분히 포함되었다면 “얼굴을 붉혔을 거예요" 따위의 답변이 시리에 탑재될 수 있었을까?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의 편견으로 인해 자진해서 유망 직종에서 물러나는 여아들이라니. 출퇴근길에 각종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콘텐츠를 소비하고, 맛집 검색부터 월경 주기 트랙킹까지 지극히 사적인 일상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기까지 했다. 이렇게 우리 일상 가까이 들어온 ICT 업계에 여성의 저대표성(under-representation)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는 이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참담한 통계들이 나에게 남긴 수많은 질문들을 안고 보고서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유네스코가 말하는 여성과 ICT 시리즈는  1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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