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럴 수 있지?
대체로 모든 죽음은 충격적이다.
갑작스럽게 죽는 것이 아닌, 예상할 수 있는 죽음도 분명 가까운 사람에게 충격을 남긴다.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것이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에 없는 데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잘 지속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너무 당연하지만 이게 당연해서 더 충격적이다.
모두가 언젠가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렇게 명백한 사실, 자연스러운 삶의 법칙은 모든 당사자에게 어느 순간에는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죽음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고나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죽는 경우, 혹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의 죽음에 대해 나는 모른다. 대신 자살 유가족이 겪게 되는 것은 조금 안다.
자살 유가족이 겪는 충격 중 다른 종류의 죽음과 다른 것은. 고인이 ‘죽음을 스스로 원했다’라는, 이유가 자살이라는 그 자체다. 굳이 죽음을 원한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였더라도, 이런 삶보다는 죽는 게 낫다는 게 고인의 결론이었다.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가 자기는 이 세상을 떠나고, 나와 나머지는 남겨지는 거였다. 자신이 없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살든 말든 그냥 사라지는 것. 그게 그 사람의 선택이었다. 미안하거나 응원하거나 뭐 그랬겠지. 그래도 내 남은 삶을 그만 보기로 선택하는 것, 자신이 나와 함께 할 수도 있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관두는 것. 그게 결론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문제는 내가 남겨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유가족이라고 불릴 만큼 충분히 가까운 관계, 법으로 봐도 남의 시선으로 봐도 충분히 가까운 관계인데, 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했다. 혹은 어쩌면 내가 있기 때문에 고인은 이런 삶 보다 죽는 게 낫다고 선택했다. 처음 발견했을 때,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보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더 충격이 큰 느낌이다.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엄마가 왜 죽었는지 알리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게 엄마가 그렇게 많이 아팠냐고 물었다. 나는 ‘그랬나 봐 요’하고 답했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는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