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믿는 게 심신에 이롭다.
내 글은 대체로 나보다 더 우울하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감정이 올라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50분의 상담 시간 동안 30분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10분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상담 시간을 겨우 10분 남겨놓고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밝다. 긍정적이다. 약간 시니컬하긴 하지만 현대의 젊은이들이 걸려버린 쿨병 수준이다.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글을 쓸 때 더 우울하고 우울한 글을 쓴다. 글은 사람을 얼마나 드러내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쓴 글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빠의 글에 대한 문학 평론가의 해설은 어둡다. 외롭고 쓸쓸하고 계속해서 공허하고, 무력한 화자가 아무런 의지도 없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내가 아는 현실을 살아가는 아빠는 강하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살면서 자신의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또 유지하는 것에 성공한 사람. 세상에서 도망칠 만큼 강하고, 도망친 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살아가고 또 살아가다 못해 그걸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 나는 약간의 수치심을 감내하겠다는 용기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작가님 소리를 듣지만, IMF 이후 사라져 버린 직장과 잘못 선 보증 빚을 두고 글을 쓰러 산골로 도망쳤다가 염소랑 아기 염소랑 음메에 하다가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가 되는 건 아무나 하는 건 아닐 거다.
트렌드를 알아야 글을 쓴다며 아빠가 중학생인 내게 자주 듣는 유행하는 노래를 물었을 때, 난 누구 노래를 들려줬더라? 아빠는 엄마가 없는 집에서 엄마랑 같이 본 적은 없지만 엄마가 사 둔 오래된 작은 티브이로 엄마는 보지도 않던 드라마를 보곤 했다. 아빠는 늘 단정한 모습이고, 혼자서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운동 겸 산책을 하고, 언제나 늘 나를 믿고, 늘 잘 지낸다고 할머니도 괜찮다고 답한다. 하지만 아빠의 글에서 아빠는 외롭고, 불안하고, 쓸쓸하고, 염려한다. 내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아빠는 글의 화자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왜 늘 글을 쓸 때 내가 더 우울한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평소에 밝게 사느라 글 쓸 땐 밝을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밝게 일상을 유지하는 나와 글 쓸 때 나 중 어디가 더 진짜 나와 가까울까? 그럼 밝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반대로 평소에는 더 침체되어 있는 건가? 알 수 없다.
애인으로 글 쓰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대체로 자의식이 강하고, 고집도 세거든. 혹여나 마음에 든다면 글을 읽는다. 무난해야 하고 특별히 꼬인 곳이 없어야 하고 자신의 불행을 한탄해서도 너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설명해도 안된다. 이상한 외국 철학자 이름을 붙이며 허세 부려선 안되고 그렇다고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것 마냥 써도 안된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글이 알려준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브런치에 가라앉은 글을 쓰고, 혼자 쓰는 일기에 내가 무엇을 더 해낼 수 있는지 끊임없이 주문을 건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쓰고 운동하고 일하고 취미를 즐기려 하고 영양제도 챙겨 먹는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쓰고 실제로도 재미는 없지만 유튜브를 보며 깔깔거린다. 살기 싫다고 쓰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지 심각하게 궁리한다. 내게 ‘잘 산다’는 말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 건지 규정하려고 머리를 굴린다.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글을 쓰고 무섭도록 매정한 사람을 만났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글을 쓰고 타인을 넘어 스스로도 속이는 사람을 만났다.
확실하게 글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의 진정한 관심사 정도다. 같은 주제로 계속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진심을 믿는다. 그 주제에 대한 관심만큼은 진짜다. 그 주제 대해 느끼는 바나 태도는 글에 적힌 것과 다를 지라도 진득한 관심은 존재한다.
글에서 묻어나는 정서로 그 사람을 단정 짓긴 어렵다. 혹시 이렇게 믿는 내가 스스로를 속이는 중인 걸까? 그림자 없는 사람이고 싶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사실 없다고 믿는 것이 심신에 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