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설계는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누구와 함께하는가.
둘째, 어떤 주제로 하는가.
내가 졸업설계를 할 때 친한 사람들은 이미 졸업설계 수업을 마치기도 했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드디어 졸업설계로 구현해보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혼자 하기로 했다. 제출까지 시간이 빠듯했기에 혼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실습스튜디오(토지이용계획)를 함께하는 상황이라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해보겠다고 했다.
졸업설계는 이렇게 진행된다. 처음 몇 주차는 어떤 주제를 할 것이고 어떻게 내용을 전개할 것인지 자료조사를 해서 가져간다. 열명이 안 되는 학생들이 교수님께 준비한 주제를 발표하고 교수님께 피드백을 듣는 과정인데 (그게 되겠어? 등) 처음에는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하루에 3-4시간, 어쩔 때는 9시간도 넘게 자료조사를 해갔다.
당시 노동과 농촌에 관심 많았던 나는 농촌에서의 도시설계 (자급자족하는 농촌), 이동노동자 휴식센터 입지 분석 등 내가 하고 싶은 주제를 가져갔다. 왜 이걸 해야 하는지보다,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보다 '내가 이런 걸 하고 싶으니까'가 중요했다. 왜 그런 피드백을 주시는지는 알겠지만 나는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반려당하는 과정은 많이 아팠다.
당시 썼던 글이 있어 가져와봤다. 이건 아직도 주제를 못 정한 3월의 일이다. 아직도 어린 마음은 양해해주길 바란다.
다들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걸 하라고 하는데 졸업 작품만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하는 게 왜 이상적이기만 한 일이고 '꿈 많은 소녀' 라고 불려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정말 좋은 주제와 기획안을 가지고 있는데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련을 겪고 있는 뭐 그런 슬픈 케이스는 아니다. 내가 부족해서 계속 주제가 안 잡히는 상태인 것인 거고, 시간은 정말 많이 들이는데도 결과가 안 나오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졸업설계는 교수님이 사회에 나갈 학생들에게 더 이상 책상 앞에서만 했던 생각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이상적인 학생에게 졸업설계는 내가 가져왔던 이상이 얼마나 효용이 없는 것인지를, 나에게만 중요할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교수님의 질문에는 단계가 있었다. (주제발표를 들은 뒤) 그걸 왜 해야 하니? (이러이러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과연 중요할까? 너한테만 중요한 거 아닐까? 나처럼 여전히 꺾이지 않은 학생들은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뵙고 이건 어떤지, 또 저건 어떤지 여쭤보았다. 그 때 교수님께서 해주신 얘기가 있다. 사회는 훨씬 냉정한 곳이라고. 이렇게 계속해서 질문하며 방향을 조정하는 과정이 앞으로는 계속 필요할 거라고 하셨다. 나에게는 특히 와닿는 말이었다.
당시 연말회고에 남긴 글을 보면 몇 개월이 지나 그 상황을 다시 바라보게 된 듯하다.
졸업설계는 많이 빡셌다. 이상과 현실의 정말 힘겨운 싸움이었다. 나는 정말 이상적인 사람이었지만, 그것 외에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런 말만 하는 거였다. 왜 되어야 하는지도 전에는 뚜렷하지 않았다면 이제 왜 되어야 하는지는 말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이해당사자를 설득할 수 있는지, 실현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다. 당시에는 교수님이 많이 야속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꼭 내면화했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내 공허한 외침은 아닌지, 정말 이렇게 해야 모두에게 좋은 것인지, 사업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하게 되어도 내가 단지 좋은 의지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끝이 아니며, 모두를 설득시킬 정당한 이유와 구체적인 추진방법이 있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매 학기마다 길게만 느껴졌던 16주가 졸업설계가 있던 학기에는 참 짧았다. 뒤늦게 주제를 정한 나는 인구감소도시를 주제로 GIS분석을 진행하고 구색을 맞춰 졸업설계 작품을 만들었다. 졸업설계 전시를 한다고도 하고, 내가 건축하는 분들을 자주 만나 졸업설계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나를 보러 와준 중문과 친구를 제외하고는 그 뒤로 누구도 졸업설계 주제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마 뒤에 대학원을 가서 석사학위논문 주제를 묻게 되서일 테다. 그러니 나처럼 졸업설계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거나 주제를 정하는 데 너무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