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전산설계실습 - 학원을 다녀도 못하면 어떡하죠?

by 삶탐구소

중국에서 돌아와 도시공학과 첫 수업을 기다리던 중 전산설계실습은 캐드, 고급전산설계실습은 스케치업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아이 기죽지 말라고 학교 가는 첫날에 좋은 옷 입혀 보내는 엄마 마음으로 기죽지 말라고 나를 학원에 보내기로 했다.


그린컴퓨터학원이었던가, 그런 컴퓨터학원에서 캐드 프로그램 전반을 배웠는데 이용법을 대충 알게 된 것이 그나마 수확이다. 수업 첫 날 외울 필요 없는 단축키 몇 개를 생각하며 이 정도면 됐어, 생각했다. 수업 첫 날, 내가 한 달 동안 배운 건데 다들 곧잘 따라했고 나도 다행히 잘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다 5주차쯤 되었을까, 내가 배운 건 끝나고 이제 도시에서 주로 쓰는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잘해야 해, 진짜 집중! 하며 들었지만 교수님은 분명 말이 느린 분인데 수업이 후루룩 끝났다. 이건 어느 한 부분을 놓치면 한도끝도 없이 밀려버리는 것이라 처음에는 부끄러움 이슈로 지금 여기까지 못 온 사람? 했을 때 어떻게든 주변을 곁눈질하며 따라가려 했지만 그다음에는 인정하고 말았다. 주변의 친절한 이들이 도와주었다. 나는 전산설계실습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비굴하게, 때로는 유머스럽게, 때로는 긴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며 생각했다.


나는 참 느린 사람이다.. 사실 내가 인문대생이라 해서 이런 걸 못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인문대생이 복수전공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필 내가 해서, 또 다들 어쩜 그리 잘 따라가는지. 이들이 프로그램적인 면에서 나보다 더 선행학습을 한 건 없었다 (오히려 학원 선행학습을 한 건 나다).


매주 전산설계실습 시간이 참 고독했고 힘겨웠다. 시험은 자유 과제로 1학기에는 캐드, 2학기에는 스케치업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1학기 과제는 정해져 있었고 2학기 과제는 자유주제여서 인상 깊었던 화이트채플도서관을 준비해갔는데 마지막에 시간에 쫓겨 거의 재창조를 하고 말았다. 수업 내내 다른 사람들은 잘만 하는 걸 잘 못 따라하고 재미도 못 느끼니 고역이었다. 우리의 진로 분야 중 하나인 엔지니어링에서는 이런 프로그램을 많이 쓴다는데 취업은 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이해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엉덩이힘으로 극복해왔다. 시간을 더 쓰면 되니까. 알바할 때도 손이 느린 편이었지만 성실함과 서글서글함이 어느 정도 커버해주는 영역이었던 거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천부적인 못함은. 늘 그렇듯 시간을 더 써야 한다, 생각하고 매주 한시간씩 일찍 가서 공부를 하고 전산실에서 복습도 했는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잘해야 재밌는 건가, 그리고 꼭 혼자 하면 막히는 부분이 생겼다. 그 다음부터 다시 진척이 되지 않으니 또 '난 안되나봐'의 반복.


1,2학기에 이은 전산설계실습 후에는 지리정보시스템실습이 이어진다. 이건 GIS를 이용한 수업인데 의외로 GIS수업은 잘 따라갔다. 실제로 도시를 분석하는 것 같아 재미가 있기도 했고 교수님도 실용적인 내용 위주로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니까 혼자 이런저런 분석을 하기도 했다. 결국 GIS를 잘 써먹은 건 대학원 때부터이지만 매 학기 배웠던 전산설계실습 수업들은 우리가 스튜디오 수업 때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공간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공간언어로 보여준다는 것 중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일 것이고 (말문을 트는 것과 같은 것이겠다) 이 툴로 어떤 어휘, 어떤 화법을 구사할 것인지가 우리가 진정 보여줘야 할 것이겠으나 학부 시절 우리는 공간언어를 보여주는 툴에 이렇게 익숙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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