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경찰서에 가서 고소장을 접수했다. 사기죄와 유사수신 혐의로.
2025년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피날레를 장식하는구나.
올 한 해 큼직큼직한 일들이 마음을 추스르려 하면 다시금 터지곤 했다. 올초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를 했고, 이직이 잘 되지 않아 사업을 하기로 했다. 생계비와 사업비를 위해 차를 팔았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2주 정도 되었을까, 17년 지기 친구를 통해 몇 천만 원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큼직한 일들이 닥쳐와도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 쳤다. 애써 나가보려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사건은 나의 모든 의지를 짓밟고 불태워버렸다. 지난주 한 주 동안 멘붕이 왔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놓아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갈 힘조차 없었다.
'우리 사기당한 건가?'라는 물음에 친구는 마지막까지 정확한 답변이나 행동지침을 내놓지 않고 장황한 설명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있는 단톡방에 나도 들어가야겠다니까 조심스럽다며 비추천했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나는 알아야만 했다.
1년을 기다렸다. 친구가 기다려달라고 한지... 1년.
내 상황이 좋지 않아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물을 때마다 전체적인 상황 설명과 자신의 힘듦을 이야기했던 그. 되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오히려 힘을 주려고 노력했던 나. 진정한 호구가 아닐 수 없다. 업데이트가 생기면 연락 준다고 해놓고 1년 동안 단 한 번도 먼저 업데이트를 주지 않았던 그. 그러다 하필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사실을 정확히 직면하고 싶어 했던 나.
피해자 단톡방에 들어가서 전체적인 사기 구조를 인지할 수 있었다. 아트딜러라고 하는 자들은 이 구조를 절대 모를 수 없었겠구나를 알게 되었고, 분명한 사기였음을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숨이 조여왔다. 나뿐만 아니라, 나 때문에 엄마까지 사기를 당했으니, 이 책임을 어쩌면 좋으랴... 처음에는 엄마와 내 돈을 합쳐 9천만 원정도인줄 알았다. 그래서 더 숨이 조였었다. 다행히(?) 피해금이 7100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줄었다....
엄마는 올초부터 계속 나에게 사기가 아닌지, 내 친구도 그들과 한통속이 아닌지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17년 지기 베스트프렌드라는 이유로, 엄마를 다그쳤고 친구를 믿어보자고 우겼다. 엄마는 다 아셨지만... 그 친구를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내가 쉽사리 엄마 말씀을 듣지 않으실 것도 아셨던 건지, 더 이상 그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않으셨다.
내가 결혼한다면 그 친구와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인격적으로 굉장히 성숙하다고 생각했고, 가정적이고, 경청과 배려가 몸에 밴 친구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나는 남자 베프는 그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친구라고 생각했던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엄마가 작년 말에 1000만 원 투자를 추가적으로 하셨을 땐, 그 친구도 이미 뭔가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하셨다. 이전과 다른 느낌이었다고... 뭔가 자신 없어하는 느낌, 끌어들이는 느낌...
그 친구는 항상 미술투자가 가장 안전한 투자라고 했다. 주식이나 부동산은 경제흐름에 따라 변동이 크지만 미술투자는 일정한 수익이 꾸준히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보험설계부터 자산운용에 있으면서 자신의 부모님의 빚을 다 갚고 집도 부모님 집과 본인집까지 2채나 장만하고, 차도 현금으로 매매한걸 옆에서 꾸준히 봐왔고, 다른 친구들의 주식투자까지 도와주며 수익이 나게끔 도와줬던 걸 익히 듣고 봐왔다.
몇 년에 한 번씩 연봉 2-3억 원의 스카우트 제의받는 것도 들어왔다. 속한 보험사나 자산운용도 몇 군데나 되었다. 100억 자산가들도 만나고 기업인들을 만나는 이야기들도 들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쌓이니 '가장 안전한 투자'라는 그 친구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가 보험설계사로 일했을 초창기에는 그 친구의 말만 들었지 투자는 하지 말아야지 했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그 친구의 도움으로 자산을 불려 나가는 걸 보니 내가 뭔가 뒤처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친구에게 처음 들었던 보험은, 20대 후반에 연금보험이었다. 그마저도 30대 중반쯤 되었을 때, 그 친구가 그 보험사를 떠났다고, 그렇지만 자기가 계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으니 걱정말라거 했었다. 보험 든 지 만 10년이 되어도 수익률이 90%에 웃돌아 도대체 100%는 언제 되는 건지 알아보다가 종신보험이 설계사들에게 가장 높은 수수료를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도 너는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택했구나.
내 보험비로 봤을 때, 나는 아주 작은 고객에 불과해서인지 관리받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바뀐 설계사가 자꾸 펀드로 바꾸라고 하는데, 그 친구는 비추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아트테크 사기 건으로 연락할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친구가 그 보험회사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그 보험회사로 들어갔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나한테는 분명히 당시 보험회사를 떠났지만 자신이 계속 모니터링할 수 있다고 말했었는데... 아, 이 말도 그가 계속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거구나. 그럼 그때도 거짓말했던 것이네. ㅆ....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돈에 자신의 양심을 팔기 시작했던 것인지, 언제부터 나에게 거짓말하는 게 익숙해졌던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처음 피해자 단톡방에 들어갔을 때는 어떻게든 친구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다 사기꾼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어떻게든 보호하려는 내 모습에 또 한 번 화가 났다. 천하에 이런 호구가 다 있을까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갤러리 대표와 아트딜러까지 고소한 상태다. 그리고 나처럼 본 적 없는 갤러리 대표보다 친구, 지인, 친척 등의 관계를 지닌 아트딜러에게 더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럼에도 딜러까지 고소했다. 나도 내 친구를 고소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도, 그럼 그 친구에게 이러저러해서라며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고 고소해야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또 다른 친구는 나에게 "너는 사기꾼한테까지 예의 차리냐?"라는 것이다. 그때 또 한 번 뒤통수 씨게 맞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이 친구를 사기꾼이 아닌, 내가 지켜줘야 할 친구로 여기는 내 모습이. 의리 있는 것인지, 정말 호구인 것인지 모르겠다.
더욱 재밌는 사실은, 오전에 갤러리 대표 고소하고 나오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엄마도 나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도 그 친구한테 말하고 고소해야겠지? 그래도 갑자기 고소, 그런 것보다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셔서, 나의 이 호구됨이 다 엄마한테서 왔구나 싶었다. 어쩜 이리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똑같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이 친구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고소를 한다면 언제 해야 할지, 그다음은 무엇을 해야 할지. 이야기를 먼저 해보는 것이 우선일지... 원래 내 방식이라면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지만, 지금은 솔직히 무섭다. 두렵고... 내가 또 어떻게 이 친구의 말에 넘어갈지 모르고, 마음이 약해질게 분명하고, 그다음... 또 어떤 부분에선 나의 잘못으로 넘겨질 것 같기도 하고, 가장 큰 건 나 혼자만 그 친구를 이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약점이다.
K갤러리 사건이 터졌을 때, 그 갤러리가 자신의 갤러리를 카피해서 사업모델을 만든 것이라며, 거기에는 그림이 없어서 문제였고 우리는 모두 그림이 있다고 안심시켰던 그.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항상 자신이 그림이 있는 걸 모두 보고 계약을 진행했다고 강조했었는데,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림이 실제 존재하는지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모든 뿌리가 서정아트센터와 K갤러리에서 나온 것었다 걸 그는 정말 몰랐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K갤러리 사건을 다룬 것을 보고 그에게 연락했을 때도 그는 다른 이야기들을 했었는데...
자신의 2명의 대표가 모두 K갤러리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단 걸 그는 정말 몰랐을까? 그 대표들 뿐 아니라 다른 갤러리 대표들도 모두 K갤러리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단 걸 그는 정말 몰랐을까? 딜러들도 피해자라고 말하면서 쉽사리 대표를 고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혐의도 입증이 될까 두렵기 때문일까 혹은 정말 사기가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일까?
정말... 모르겠다.
올해를 이렇게 장식하는구나.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모두 놓고 싶은데... 놓을 수 없는 것 또한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정말 도망쳐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내가 듣고 싶었던 말 한마디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뿐이었는데...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말인가 보다. 혹은 진심으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그림을 구매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본인들이 사놓고 자기한테 따진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서 진작 알았어야 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