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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비 Feb 27. 2020

정확함은 경쟁력이다

오랜만에 은행을 방문했다. 모아둔 동전을 지폐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은행에 들어서자 동전교환기계가 눈 앞에 보였다. 기계에는 안내문구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동전교환은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입니다.” 점심이 지나 은행에 들어섰기에 기계 이용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혹시 창구에서 교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마침 청경이 눈앞에 보였다.


청경에게 다가가 물었다. “동전교환 기계는 오전밖에 안된다고 쓰여 있네요? 그럼 지금 창구에서 바꿀 수 있나요?” 청경은 정확히 이렇게 대답했다. “저기 쓰여 있는게 직원들이 쓴 것입니다.” 순간 나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일단은 저 문구는 당연히 직원들이 썼겠지.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보았을까? 그리고 창구 이용 여부와 저 문구를 누가 썼는가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청경이 나의 질문을 잘못 이해한건 아닌지 다시 물었다. “지금 창구에서 동전 못 바꾸나요?” 청경은 정확히 다시 똑같이 대답했다. “저 문구가 직원들이 써서 붙인 거라니까요” 답답한 나는 다시 물었다. “안 된다는 거죠?” 그제서야 청경이 대답했다. “네.”


내가 센스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해주길 바랐다. 가능 여부를 물어보았으니 ‘된다’ 혹은 ‘안 된다’를 말해주면 되었다. 질문에서 약간 벗어난 대답은 오히려 혼란을 야기했다. 은행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에 답답했던 대화 내용을 되새김질 했다. 청경의 입장을 헤아려보려고 했다. 어쩌면 그 분은 고객들에게 “안 됩니다” 라는 부정적 멘트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청경의 입장에서는 부정어인 ‘안’, ‘못’을 사용하지 않고서 가장 정중하게 응대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시 생각했다. 청경의 자리에 키오스크가 아닌 사람이 서 있는 것은 필요한 질문에 더 정확한 솔루션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청경은 기계에 쓰여 있는 것을 자신의 답변 멘트로 대신하려고 했다. 정확한 답변을 구상하지 못한 청경에게서 게으름을 발견했다. 그러나 생각을 게으르게 하는 것은 청경의 일만은 아니었다. 당장 나만 해도 늘 생각이 게을렀다. 나 역시 정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좋고 싫음, 나쁨과 좋음에 대한 명확한 의견을 잘 제시하지 않았다. 많은 생각들을 뭉뚱그리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기보다 대략적인 느낌을 좋아했고 분명히 나누기보다 포용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서 늘 나의 표현은 두루뭉술하고 애매했다.


게으른 표현은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과는 직접 대면하는 순간보다 기계 안에서 만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기계 안에서의 대화는 재밌는 얘기에는 ‘대박’, 충격적인 얘기에는 ‘헐’, 혹은 느낌 살린 이모티콘 하나면 편리했다. 그만큼 생각도 대화 내용도 점점 단순해졌다. 머릿속 느낌 혹은 생각을 표현해내기 위해 어떤 문장을 써야할지 고민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생각이 게을러지니 표현도 게을러졌다.


게으름은 중요한 순간에 독이 되었다. 분별하고 선택해야 할 순간에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분별력을 잃어갔다. 콘텐츠가 넘치는 요즘 특히 그렇다. 넷플릭스나 유튜브는 내가 좋아할만한 영상을 잔뜩 추천해준다. 나에게 왜 이런 것을 추천해줬는지 느낌은 알겠지만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뭐부터 봐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하나씩 보긴 하지만 계속되는 추천 리스트는 죽을 때까지 다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봤더니 재미는 얻었지만 별다른 통찰은 얻지 못했다. 알맹이 없는 재미였다. 이러다가 나는 분별력 없이 무한 콘텐츠 시장에서 재미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 영상을 다 보는 것보단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문 쓰기 혹은 기록하기 같은 건 당장은 너무 거창해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적어도 생각하고 그 생각을 문장으로 정리해보기 정도를 실천해보려고 한다. 내가 본 콘텐츠는 어떤 콘텐츠였고 그에 따른 나의 감상은 어땠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재밌었다. 신기했다. 흥미로웠다”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밖에 못 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생각하고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니까. 더군다나 빨리 많은 것을 봐야하는 지금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제는 생각과 표현을 게을리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시대다. 서비스와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들은 편리함을 내세운 기술을 계속 출시한다. 우리는 편리함에 길들여지면서 정확하게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기 쉽다. 이런 시대 속에서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좋고 나쁨을 분별해내는 것은 곧 능력이고 경쟁력이다. 정확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결정권이 돌아올 것이다. 정확함 이야말로 지금 이 세상에선 대화를 누구보다 빨리 하는 것보다 콘텐츠를 많이 보는 것보다 좋은 경쟁력을 기르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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