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언제가 될까..?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시간이 무려 3시간이 넘는다. 왜냐고? 면을 직접 뽑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육수는 레토르트로 해결해서 3시간 정도지 육수도 냈다면 훨씬 더 오래 걸렸겠지.
이 냉면을 성공하기까지 투입된 노력과 시간(이라 쓰고 삽질이라 읽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통방통하다.
먼저 '우리' 냉면 뽀얀 자태 좀 보고 가실게요.
냉면은 온 가족이 좋아하는 메뉴다. 6살 딸내미는 한겨울에도 종종 냉면을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 먹는 거에 매우 진심인 엄마 아빠를 닮아 우리 딸내미도 먹는 것을 좋아한다. 다행히 나는 요리를 즐기는 편이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이건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곤 한다. 그렇다고 냉면을 면까지 뽑아서 만들어 먹을 줄은 나도 차마 몰랐다.
마지막으로 식당에서 냉면을 먹은 게 벌써 한 2년은 된 것 같다. 한국에서도 냉면이 비싸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미국의 한인식당에 비하겠는가. 2년 전에도 이미 $25이 넘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레토르트만 사다 먹은 듯하다. 면과 육수까지 패키지로 다 돼 있는 제품은 냉장고 자리도 너무 많이 차지한다. 꽤 훌륭한 제품도 종종 봤지만, 뭔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파스타메이커를 들였다.
모든 건 장비빨이다. 게다가 나는야 내추럴 본 맥시멀리스트. 요리를 좋아하는 고로 각종 요리 장비도 많다.
좁은 부엌에 빼곡히 들어찬 짐을 이고 지고 살아야 할 판이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지만, 파스타메이커가 욕심이 난 지는 벌써 꽤 됐다. 실은 몇 년 전에 한 번 사기도 했다. 코로나로 셧다운이 되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 차오르던 불만이 물욕으로 폭발했던 2020년이었다. 생면이 건면보다 훨씬 맛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재료를 넣고 조금 더 건강한 파스타를 만들 수 있고, 만두피도 만들 수 있다기에 마음이 부풀어 오르던 차였다. 파스타의 본고장 이딸리아 산 마카토 제면기를 아마존에서 할인해서 50달러쯤에 판다는 소식을 듣고 결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 나의 제면기는 도착은커녕 출발하지도 않았고, 결국은 환불을 받았다. 그렇게 끝이었다. 아니, 끝인 줄 알았다.
심플스텝스 연말파티로 갔던 1일 요리교실에 바로 그 마카토 제면기가 있었다. 유독 눈을 반짝이며 파스타 반죽을 하고 신이 나서 제면기를 돌려대는 내가 심상치 않았나 보다. 같이 갔던 사람들이 아무래도 내가 곧 제면기를 주문할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부엌 짐이 많아서 안 돼요."라고 수줍게 웃었지만, 그날 먹었던 파스타의 맛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그날 소스도 좋았지만, 핵심은 면이었다. 건면과는 비교 자체가 미안할 정도였다. 며칠 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는 아마존에서 제면기를 검색하고 있었다. $90이라니! $50에 샀다가 환불한 걸 $90에 살 수는 없었다. '그걸 언제 또 다 돌려서 뽑아 먹겠어. 요리 이제 좀 줄이기로 했잖아. '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새롭게 구매욕의 불씨가 댕긴 건 심지어 덩치도 더 크고 훨씬 더 비싼 필립스 파스타메이커였다. 가루와 물만 넣으면 알아서 반죽을 해주고 압출식으로 면을 뽑아준다니. 파스타는 그렇다 치고... 결정적으로... 한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파스타메이커로 냉면을 뽑을 수 있다는 글을 보았다. 냉면, 우동, 라멘 면, 파스타 면, 밥 없는 날, 밀가루와 물 넣고 휙~이라니 얼마나 좋아!라고 되뇌다가도 $300 가까이하는 그 덩치 큰 기계를 선뜻 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흘렀다.
물욕은 죽지 않는다. 잠시 사그라드는 척할 뿐.
사촌동생네 놀러 갔는데 마침 한국에서 와 계셨던 삼촌과 외숙모께서 혹시 갖고 싶은 것 없냐고 물어보셨다. 애써 잠재웠던 물욕이 활활 불타올랐다. 금액도 덩치도 커서 망설이는 게 있다고 하니 편하게 말하라고 하시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제를 해주셨다. 뛸 듯이 기뻤다.
짐이 좀 많으면 어때. 잘 쓰면 되지. 기왕 살 거면 빨리 사서 많이 쓰는 게 낫지. 안 그래?
파스타메이커가 도착했다.
한인 웹 커뮤니티에 올라온 요리 고수님의 냉면 레시피를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 고구마 전분과 밀가루, 물을 넣어 돌린다. 처음에는 압출할 때 꽉 막혀서 안 나오고 디스크에 막혀 있는 것을 다 빼주는 게 매우 번거롭지만, 두 번 세 번 뽑으면 거짓말처럼 매끄러운 면발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 잘할 수 있을 거야!
야심 찼던 첫 시도는 그야말로 처참한 실패였다.
아이가 마침 친구네서 놀다 오기로 해서 저녁 때는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냉면을 해 먹자고 불렀다. 오기 전부터 재료를 계량하고 파스타메이커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모양새가 영 시원치 않았다. 사람이 많아졌으니 재료를 2 배합해서 그런 건지 뭔지 아무리 봐도 너무 반죽이 뻑뻑했다. 혹시... 내가 깜박하고 물을 2배 안 넣었나? 아닌데. 분명히 두 번에 나눠서 넣었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물을 1배 분량을 더 넣었다. 보슬보슬 가루만 같았던 게 제법 반죽 같아졌다. 곧 냉면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두 번째 압출을 하기 전까지는.
처음 압출을 하고 디스크 구멍들을 모조리 막은 반죽을 일일이 다 빼서 기계에 넣고 다시 반죽을 돌리고 두 번째 압출을 시작하는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나오는 것이 면 형태긴 면 형태인데 뭔가 곤죽 같은 느낌? 앗차. 나를 믿고 그냥 된 반죽 그대로 돌렸어야 했다. 이제 와서 처음부터 새로 재료를 넣기에는 고구마 전분이 모자라고 이미 진 반죽에 전분과 밀가루를 더 넣어서 다시 만들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다행히 곁들여 내기로 했던 돼지 불고기를 구워 밥을 먹었다.
친구네가 느지막이 돌아가고 친구와 놀아서 한껏 신난 아이를 진정시켜 재우고 남편마저 일찍 뻗은 한밤중에 나 홀로 고난의 반죽 복원 작업(삽질)을 시작했다. 밀가루와 전분을 1배 분량을 더 넣고 따로 반죽을 해서 세 반죽을 다 합하고 압출을 하기 시작했다. 1배 분량의 반죽에 필요한 압출은 서너 번. 3배 분량이 된 반죽을 2개로 나눠서 최소 6번 압출을 했다. 디스크 구멍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정도는 덜했지만, 어김없이 매번 막혔다. 10시 좀 전에 시작한 작업은 1시가 훌쩍 넘어 끝났다. 그렇게 완성한 면을 밀폐용기에 담아놓고 뻗었다.
다음날 저녁, 남편이 회사에서 늦게 온다고 해서 딸이랑 둘이 냉면을 해 먹었다. 쫄깃한 면발 덕인지 MSG 가득할 사제 육수 덕인지 아이는 연거푸 맛있다는 감탄을 하며 한 사발을 금세 비웠다.
성공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지만, 달밤에 체조도 아니고 혼자 장시간 삽질을 해서인지 좀처럼 냉면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오늘 저녁은 꼭 냉면을 먹고 싶다고 하는 아이의 말에 못 이긴 듯 재료를 더 사 왔다. 다행히 전에 남겨뒀던 면이 있으니 남편과 함께 먹어도 1.5배 분량만 돌리면 되겠지 싶었다. 이번에는 혼자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그. 러. 나. 밀폐용기에 물이 들어갔었는지 남겨뒀던 면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3배 분량을 했을 때의 고생을 떠올리니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냥 2배 분량만 만들어 먹기로 하고 비장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아이는 마냥 좋아했다. 냉면을 먹자고 한 본인의 의견을 들어준 것도 좋았던 데다 파스타메이커 돌리는 것도 재미가 있었나 보다. 아무래도 자기는 버튼만 누르고 면을 스크레이퍼로 끊기만 하면 되니 안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전자동 모드로 반죽에서 압출까지 이어지는 기계를 3분 반죽하고 압출로 넘어가기 전까지 끄기를 3번 반복해야 하는데, 버튼을 누르는 표정이 어찌나 결연했는지 모른다.
문제는 남편이었다. 웬만하면 하지 말자가 신조인 분께 가장 힘든 작업인 디스크 구멍을 막은 반죽을 빼내는 작업을 맡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작업은 내가 봐도 만만치 않았다. 반죽이 거의 떡처럼 매우 단단하게 꽉 막혀 있는 데다 매끈한 면을 만들려면 아래처럼 막힌 디스크 구멍을 뚫는 걸 3~4번 반복해야 한다.
압출이 계속되고 구멍 뚫기를 반복할 때마다 남편의 얼굴은 갈수록 일그러졌다. 그래도 그 덕에 처음에는 이게 과연 면발인가 싶을 정도로 뚝뚝 끊기기만 하던 면발이 압출을 거듭할수록 매끄럽고 길게 나왔다. 절로 환호성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맛은 어땠냐고?
압출을 거듭하고 디스크에 막힌 반죽을 빼낼 때마다 과연 이렇게까지 해서 만들어야 하는 거냐고 이의를 제기하던 남편도 냉면을 맛보고는 다음번을 기약했다. 제작 과정은 좀 개선해야겠다며 파스타메이커에 가루와 물을 바로 넣지 않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서 물을 잘 머금게 하고 반죽을 미리 많이 하고 집어넣으면 압출할 때 좀 낫지 않겠냐고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냥 하지 말자가 아니라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라니... 엔간히 맛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뒤로 3주가 지나도록 아직 개선방안은 실험해 보지 못했다. 물론 그 사이에 캠핑도 다녀오고 열흘 거하게 아프고 알러지가 도지는 등 여러 일이 있었다. 지인들에게 우리 집에 와서 냉면을 만들어 먹자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아무래도 없던 일이 될 것 같다. 세 식구 먹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과연... 여러 명이 먹을 면을 만들 수 있을까. 쉽게 나오는 반죽이 아니라 안 그래도 굉음이 나던 파스타메이커를 더 많이 돌리면 고장 날까 겁도 난다. 웬만하면 식탐이 힘듦을 이기는데, 이건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치킨누들수프에 들어가는 에그누들을 만들었을 땐 그래도 꽤 수월했다. 아무래도 파스타메이커는 본연의 이름에 충실하게 '파스타'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일 것 같다.
냉면, 안녕. 조만간 또 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