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는 봤나, 사과병
퇴근 길,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버스가 정류장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타기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버스를 타기 위해 미친듯이 달렸다. 다행히 버스가 출발하지 않고 있었고 내가 재빨리 올라탔다. 기다려 준 기사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 숨을 헥헥 대며 감사하다고 말하고 카드를 찍었다. 보통은 이런 경우 가볍게 목례를 해주시는데 버스 기사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고맙다고 말할 게 아니라!"
버스기사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말을 이었다.
"이러면 신호 다 놓친다고. 지금 고맙다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 이건 또 웬 날벼락이냐. 누가 기다려달라고 사정했나 그냥 버스가 근처에 있길래 달려온 것 뿐인데.
"고맙다고 말하는 게 다가 아니라고. 나한테 고맙다고 말할 게 아니라 기다려 준 승객들한테 고맙다고 하세요!"
난 그렇게 버스에서 한바탕 혼이 났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승객들을 돌아보니 다들 스마트폰 삼매경. 애초에 내가 타든 말든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타인의 짜증을 온몸에 뒤집어 쓴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무척 화가 나서 할말을 잃은 채 잠시동안 카드 리더기 앞에 서 있었다. 기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말라고 여러 번 강조했는데 하필 '고맙다'라는 말에 대한 대답이 짜증과 원성과 훈수라는 게 나를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고맙다고 말한 게 그렇게 잘못인가...?
아니다. 그냥 기사는 짜증을 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구겨진 인상과 쳐진 입꼬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오늘 하루동안 차곡 차곡 쌓은 스트레스와 피로를 쏟아 놓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게 나였던 거고. 하지만 버스 기사만 그럴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오 치 인내심을 모두 써버린 상태였고 그 기사의 사정(오늘 좀 안 좋은 일이 있었나?)을 생각해 줄 여유가 없었다.
"아니, 제가 기다려달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왜 저한테 승질이세요. 그럼 그냥 출발하시면 되잖아요. 기다려달라고 제가 사정했나요? 그리고 솔직히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잖아요. 보니까 사람들 계속 내리던데, 아직 덜 내려서 어쩔 수 없이 서 있던거면서 왜 나한테 짜증이야 진짜. 기분 안 좋은 일 있으면 알아서 해결하세요 만만한 사람한테 풀지 마시고요!"
삐, 소리와 함께 버스가 출발했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다. 모두 다 내 상상이었다. 나는 상상을 멈추고 겨우 한마디 내 뱉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버스가 급 출발하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겨우 내뱉은 말이 죄송하다는 말이라는 게 너무 바보같고 한심해서 속이 끓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건 버스를 놓칠까봐 뛴 것밖에 없는데 난 왜 죄송하다고 말했을까. 요즘 읽고 있는 소설이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어 그런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남자였으면 분명 저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라고. 내가 여자니까, 자기보다 어리고 만만하니까 자기가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던 거라고.
머릿속으론 대응해야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무의식 그대로 반응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저 사람은 남자고, 어른이니까 나보다 우위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그 사람이 원했던 바로 그 반응을 내가 해주었다는 게 너무 분이 나고 약이 오른다. 저 인간은 또 만만한 사람한테 자기가 받은 스트레스를 풀겠지. 버스에서 느낀 수치심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안 볼 사람들이고 오늘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테니까. 나를 속상하게 하는 건 내가 했던 말이 '죄송합니다'라는 것이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오늘 나는 나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 다섯 글자 때문에 기사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도,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도 없다는 걸 증명하지 못했다. 억울하고 분하다. 속으로 그 기사를 향해 쌍욕을 퍼부어봤지만 어차피 그 기사는 듣지도 못하니 억울한 마음만 커질 뿐이다.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한 가지 뿐이다. 다시는 미안하지 않은 일에 사과하지 않는 것. 내 무의식이 오늘 일을 두고 두고 잊지 않고 기억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안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배짱이 생기기를. 아니면 우리반 애들한테 배울까. "어쩔티비 저쩔티비 안물티비 안궁티비 우짤래미 저짤래미 쿠 쿠루빵빵 지금 화났쥬? 아무것도 못하쥬? 어차피 우리 집도 모르쥬? 또 화났쥬? 물어본 사람? 궁금한 사람?" (찾아보고 읽는 순간 약이 바짝 오른다. 비상시를 대비해 외워야겠다.) 더불어 내게 쌓인 스트레스를 타인에게 절대로, 절대로 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내 스트레스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자. 부지런히 스트레스 관리 능력을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