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리터의 아메리카노

by Charles Walker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차건은 나중에 교무실로 오고.”

“쌤, 차건 없는데요?”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어.”

민규는 뱀눈을 요리조리 뜨며 건이를 찾았지만, 교실 어디에도 건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규의 얼굴이 붉어지며 고성이 터져나왔다.

“그 새끼 그거는 하여간 안 돼. 아직 수업 땡도 안 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토껴? 싹수 노란 새끼.”

질펀한 욕을 실컷 뱉어대더니, 이내 민규의 뱀눈이 한곳에 멈춰선다.

“야, 채윤수. 너새끼는 안 가냐? 너 차건 꼬붕이잖아, 새꺄.”

갑자기 튄 불똥에도 윤수는 조금의 동요 없이 텅 빈 책상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약이 바싹 오른 민규는 아예 윤수의 자리로 다가가 윤수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퉁퉁 밀며 말을 이어갔다.

“쌩까냐? 왜? 자존심 상해? 지난번처럼 또 덤비지 그러냐. 차건 아니었음 넌 그때 나한테 뒤졌어, 새꺄.”

윤수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약간 일그러졌지만, 그뿐이었다. 교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은 민규와 윤수 쪽을 향했다. 하나같이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마침 종료령이 울렸다.

“인사 생략. 종례도 생략. 빨리들 꺼져.”

민규의 말 한마디에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교실 밖으로 나가는 민규의 뒤통수에 대고 중지손가락을 날리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윤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빈 가방을 메고는 중얼거렸다.

“차건 새꺄... 같이 가자, 좀.”



그 시각. 건이는 반이의 교실 앞에서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5분이나 일찍 민규 몰래 나와서 여자애들 교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어째 좀 모양 빠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부턴 3분 전에 나와야지. 아우씨, 근데 배민새끼 목소리 듣기 싫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드디어 기다리던 종료령이 울렸고, 건은 교실 뒷문을 힘차게 열며 외쳤다.

“하반! 가자!”

이름이 불린 반이는 그만 얼굴이 벌개져 버렸다. 교실 안의 여학생들의 우우 소리가 환영처럼 울려퍼졌다.

“반이야. 오늘따라 신랑이 좀 빨리 오셨네?”

“시끄러, 기집애야.”

그러나 지금 교실에서 가장 황당한 상황을 맞이한 사람은 아직 교실을 나가지 못한 선생, 윤이었다.

“야, 차건. 아직 선생님이 나가지도 않았는데 뭐하는 거야? 너 당장 뒤로 따라나와!”

건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윤이를 따라 홈베이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건.”

“네.”

“지킬 건 지켜야 할 거 아냐. 너희 반은 종례도 안 해?”

“...안 해요.”

1차로 할 말이 없어진 윤이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종 치자마자 여학생 교실에 네가 나타나는 상황은 네가 생각해도 좀 아니지 않냐? 수업 끝나기 몇 분 전에 나왔어?”

“...5분 전에요.”

“거봐, 임마. 수업 시간에 학생이 그러게 돼 있냐?”

“아니, 그게... 진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복도를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건이와 윤이 쪽을 돌아보았으나, 자신의 입을 자신이 막은 건이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는 윤이를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학교에서는 존댓말 쓰랬지.”

“미안해, 형. 아, 아니... 죄송해요 쌤.”

“뭘 참을 수가 없는데?”

“...생각을 해 봐. 형. 내가 제일 극혐하는 선생 수업에다, 이거만 끝나면 집에 가는데, 반이도 너무 보고 싶고, 그럼 이게 참아져? 안 참아져?”

꽝!

기어이 꿀밤 한 대를 얻어맞은 건이었다.

“...네 말 하나하나 틀린 건 없다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 어른이 되는 거야, 짜샤. 그리고 존댓말 쓰라니까 끝까지 반말.”

“...쏘리, 쌤.”

윤이는 피식 웃고 말았다. 터울이 많이 나서 거의 업어 키우다시피 한 동생이다. 크게 바라는 것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렇게 커서 자신의 직장에서 행패 부리는 녀석 1로 활약하고 있다. 그래도 어쩌랴. 혈육이니 거두어야지.

“지금쯤 반이네 종례 끝났을 거야. 이제 가 봐.”

건이는 인사까지 꾸벅 하고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야, 하반! 같이 가아!”

멀리서 건이의 보채는 소리가 들린다.

“못 말려, 정말...”



“빨리 따라왔네?”

“기다려 주지도 않고. 너무해.”

“형제 간에 할 말이 많아 보이길래.”

“아, 진짜. 우리 형은 너무 FM이야. 구식. 꼰대.”

“그래도 우리 학교에 차 쌤만한 쌤 없어. 너네 형이라서가 아니라 진짜로.”

건이는 반이가 자기 형을 칭찬하자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졌다.

“흠. 그건 인정.”

“어쨌든. 이제 어디 갈 거?”

반이의 물음에 건이의 두뇌가 급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떡볶이?”

“안 땡겨.”

“오락실?”

“재미없어.”

“커피?”

“많이 마셨어.”

“어느 틈에?”

“나 집에서 내려서 오잖아. 아메리카노 1리터. 내 하루 복용량 몰라?”

“아, 맞다...”

“야! 차건!”

돌연 불청객처럼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민규였다.

“에이씨...”

“당장 일로 튀어와!”

건이는 반이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잠깐 기다려줄 수 있어?”

“응. 다녀와.”

반이는 속말로 ‘건투를 빌게’를 삼키며 건이를 보냈다. 도살장에 끌려간 소마냥 민규 앞에 선 건은 민규가 마침 들고 있던 출석부 세례를 온 머리로 받아내야 했다.

“너는, 새꺄,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튀어가서, 이제, 기어와, 엉? 학교가, 싫으면, 자퇴를, 하든가, 반이가, 좋으면, 결혼을, 하든가, 이도, 저도, 아닌 게, 엉? 왜 이렇게, 깝쳐, 깝치길? 엉?”

말끝마다 도합 스물일곱 대를 얻어맞으며 잔소리 폭탄주를 연거푸 들이마신 뒤에야 건이는 민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종료 5분 전의 도피는 그 대가가 혹독했다. 건이는 반이에게 돌아와 그 앞에서 이를 갈았다.

“나 학교 때려칠래...”

“일단 나가자. 커피 마시러.”

“너 커피 안 마신다매.”

“다른 거 마시면 되지롱.”

반이는 유난히 더 밝은 티를 내며 건이에게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건이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좋아. 그럼 가자구.”

건이는 반이의 손을 덥썩 잡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