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부를 안 하는 이유
빨대 들이키는 소리가 크고 거칠다. 카페 전체를 덮어버릴 듯한 그 소리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건이다. 그 앞에 마주앉은 반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듯 태연하다.
“아까 배민 나한테 막말하는 거 봤지? 하...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만 보면 지랄이야...”
“진짜 학교 때려치게?”
“엉?”
건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배민 말대로 학교 때려칠 거냔 말야.”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지만, 건이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이는 지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음을. 이럴 땐 본능적으로 안다. 꼬리를 확실히 내려줘야 하는 법.
“...아니야. 홧김에 그랬어.”
“대책 없이 말부터 하는 남자, 난 매력 없어.”
“알았어. 미안해.”
반이는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자신 앞에 놓인 딸기 스무디 한 모금을 마신다.
“...반이야.”
반이는 대답 대신 빨대를 문 채 건이를 바라보았다.
“넌 공부가 재밌어?”
하마터면 음료를 뿜을 뻔, 반이가 울컥하며 빨대를 빼낸다. 그리곤 몇 번 잔기침을 하더니 건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런 질문을 반이 같은 모범생이 한두 번 받은 건 아닐 터. 새삼 놀랄 것도 없지만, 사귄 지 올해로 6년 차 되는 남자친구이자 공부랑은 아예 담을 쌓은 차건에게 그 질문을 들을 거라곤 반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물어, 그런 건?”
“그냥... 난 공부가 너무 싫은데, 재미없어서 안 하는데, 열심히 공부하는 너는 그걸 좋아서 하는 건가 싶고, 진짜 좋은 거면 둘 중 하나는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싶고...”
반이는 자신도 모르게 깔깔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한참을 웃고 나서 반이는 대답했다.
“공부가 좋아서 하는 애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
건이는 무슨 말인가 싶어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나는 아냐, 그런 부류.”
반이의 단호한 선언에 건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치? 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휴... 아 진짜 다행이다. 나나 너 둘 중 하나는 진짜 이상한 애일까봐 내가 얼마나...”
“근데, 건이야.”
“...응?”
“넌, 왜 공부 안 해?”
기습적으로 들어온 질문에 이번엔 건이가 당황했다. 연인으로 지낸 지 6년 동안, 공부를 주제로 대화한 적은 없었다. 서로 그런 부분에서는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걷고 있기에 암묵적으로 서로를 존중하기로 했던 건지, 아니면 이런 걸 잘못 얘기했다가는 싸움이 될까봐 애초에 피했던 건지 어쨌든. 하지만 이번엔 이 주제를 건이가 먼저 꺼냈기에 이제와 무를 수도 없다.
“글...쎄? 재미가 없어서?”
“그 얘긴 아까 했잖아. 그건 알아. 나도 그렇거든.”
건이는 생각했다. 반이가 먹는 딸기 스무디에 뭔가 이상한 약이 들어갔나. 얘가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나. 앗, 잠깐. 반이도 지금... 공부가 재미없다고 했지?
‘그럼 내가 대고 있는 재미없다는 건 나만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건가. 내가 공부를 안 하는 이유? 그런 게... 있나?’
한참 동안을, 건이는 반이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요란하게 굴려댔다. 하지만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하루아침에 답이 나올 문제일 리가 없지.
반이는 컵을 내려놓고 건이의 입술에 입을 쪽 맞추고는 말했다.
“준이 선배 운동하는 거나 보러 가자. 얼른 일어나.”
건이는 도대체가 현실감이 없는 채로 눈을 몇 번 끔벅이고는 주섬주섬 일어나 반이를 털레털레 따라갔다.
한얼고 배구부실. 오후 7시. 예상대로 불은 켜져 있다. 한얼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따뜻한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에도 꿈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영혼들이 있다. 그들을 응원하러 건반 커플이 찾아왔다. 양손을 무겁게 하고서.
“형들 분식 먹으려나?”
“분식 안 먹는 고딩도 있냐?”
반이의 말에 건이는 쿡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들어가자.”
건‧반은 큰 문을 힘차게 열며 외쳤다.
“서프라이즈!”
그 소리에 네 명 남짓 되는 배구부원들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저마다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지만, 냉큼 달려나와 반이의 손에 들린 음식을 나눠 들어준 이는 준이뿐이었다.
“역시 선배밖에 없네.”
“척하면 척준 아니냐. 어서들 오라구.”
“형은 내 건 안 들어주고.”
“내 손이 네 개냐, 임마? 네 건 네가 들어.”
말은 그렇게 해도 준이가 건이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방그레 웃고 있었다. 건이도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연습하시는데 방해한 건 아녜요?”
“이런 방해는 얼마든지 땡큐지. 마침 오늘 야간 연습 인원이 제일 많은데. 잘됐네.”
준이는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음식 세팅에 여념이 없었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준이는 같이 연습하는 배구부원들을 소개했다. 2학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3학년이었다.
“선배들은 이제 졸업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그렇지... 말로만 듣던 실기 시험이 정말 눈앞에 다가오니까. 압박감이 상당해. 너희들 수능시험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녜요. 어찌 보면 예체능이 더 빡센 것 같아요.”
“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당.”
떡볶이와 순대를 양볼에 장착한 채 건이는 철모르는 소리를 해댄다. 반이는 가만히 눈을 흘겼고, 준이는 건이에게 헤드락을 시전했다.
“아야~ 이 형이 갑자기 왜 이런담?”
“얘 어떡하지 이거? 반이야. 너 진짜 이 자식 건사할 수 있겠냐?”
반이는 짐짓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배구부원 모두 그 모습에 배를 잡고 웃었고, 건이는 묘하게 기분이 언짢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언짢은 기분을 아무에게도 풀 수가 없는 거다. 순간, 건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준이를 비롯한 배구부원들 모두 이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하느라 학교에 남아 있고, 저기 저 예쁜 (나의) 반이도 이렇게 나랑 놀고 나서 집에 들어가면 공부하느라 거의 밤을 새우고 다음 날이면 예와 다름없이 커피 1리터로 버틸 것이다.
여태껏 해 본 적 없던 생각이 갑자기 고개를 든다.
‘다들 엄청 열심히 사네... 나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