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책상에 앉았다. 낮이 긴 유럽의 여름. 아직 밖에는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틈틈이 써두었던 내 마음들을 한데 모아 갈무리를 했다. 너무 글이 길어지지 않게, 그러나 꼭 하고 싶은 말들을 빠뜨리지 않게 신중하게 내 마음들을 담은 문장을 한데 모았다.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았다. 마지막 편지니까, 너와 나 두 사람 모두에게 모국어가 아닌 언어이니까, 오역의 가능성 없이 온전히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해서 문법을 손봐 달라고 했다. 인공지능에 의해 조금 더 매끄럽게 다듬어진 글을 한 번 더 확인하고 펜을 들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편지지였다.
펜을 들어 그의 이름을 가장 윗줄에 썼다. 한동안 메신저에서 언제나 가장 위에 자리하던, 내가 가장 많이 불렀던 이름이었다. 아랫줄에 신중하게 첫 문장을 썼다. '아마 우리 둘 다 더 이상 이 관계가 희망이 없단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지난 며칠간 써두었던 편지의 첫 문장은 원래 이랬다.
안녕 A. 나는 편지 쓰는 걸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야. 사실 스위스에 갔을 때 내가 보는 예쁜 풍경이 담긴 엽서를 보고서 너에게 하나 부쳐볼까 생각을 했지. 그런데 그때 우리는 갓 데이트를 시작한 시점이었고, 그래서 네게 부담을 줄까 봐 차마 보내지 못했어. 네게 처음 쓰는 편지가 마지막 편지일 줄 알았다면 그때 그냥 한 장 보낼 걸 그랬어.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더 이상 우리에게 이런 감정적인 공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는 어차피 오버하지 말라고 할 텐데. 썼던 글을 지우고 내가 끝내해야 할 말을 간결하고 짧게 썼다.
한 자씩 또박또박 쓰다 보니 꽤 시간이 걸렸다. 연애편지를 쓸 때와 다름없이 정성스럽게 쓴 이별 편지를 정확하게 삼분의 일로 접어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면에 한국어로 그의 이름을 썼다.
처음 그의 집에 갔을 때 책장에서 집어든 책을 그는 빌려가도 좋다고 했다. 한국어판이 절판되었던 책이라 사양하지 않고 집으로 들고 왔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우리 관계가 먼저 끝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에게 빌린 책 속에 편지 봉투를 끼웠다. 혹시라도 빠지는 일이 없게 안쪽으로 깊숙하게 끼웠다. 종이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걸어서 1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서로가 산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던 그와 나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하루가 머다 하고 걷던 길이었다. 함께 손을 잡고 우리 집으로 왔을 때에도, 혹은 그를 만나러 그의 집으로 향할 때에도, 많을 때는 하루의 네다섯 번도 오가던 길이었다. 이제 십오 분 뒤면 더 이상 그곳을 목적지로 두고 걷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갓 지기 시작한 해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열기로 피부 위에 내려앉았다. 유럽의 여름에서 자외선이 가장 강하고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은 정오가 아닌 해가 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는 오후 네시에서 일곱 시 사이다. 서두를 필요 없이 그의 집을 향해 걸었다. 혹시라도 예상에 없던 마주침을 겪을까 조금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골목에 들어섰다. 그의 집 옆에 있는 식당으로 발을 디뎠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유대인 지구에 위치한 유대인 식당이어서 비유대인 손님의 등장에 가게의 주인과 식사를 하던 유대인 가족들까지 식사를 멈추고 나에게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나는 조심스레 인사를 하고 말을 꺼냈다.
"저.. 다른 게 아니라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요. 여기 식당 옆집에 친구가 사는데 물건을 급히 맡겨야 해서요. 이따 저녁에 가게 문이 닫기 전에 찾으러 올 거예요. 혹시 몇 시간만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그렇다고 적대적이지도 않은 얼굴의 직원은 아주 짧게 생각하다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인사를 하는데 직원이 되물어온다. "그런데 친구 이름은?"
"아.. A요." 친구면 직접 줘도 될 일을 굳이 처음 보는 식당에 들어와 친구라는 남자에게 줄 물건을 맡기는 여자. 직원은 무슨 상황인지 예상이라도 한 걸까. 그는 아무 말 없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그저 종이 가방 위에 이름을 적었을 뿐인데 나는 괜스레 혼자 제 발을 저리고 얼굴을 붉히며 감사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다시 가방을 돌려달라고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가게를 나와 모퉁이를 도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비로소 저질러버렸다는 게 실감이 나서, 이토록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게 허탈해서, 이별을 결심하기까지 나를 그리도 겁먹게 했던 게 도대체 뭐였나 싶어서,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꽉 막힌 무언가가 비로소 풀려나가는 후련함이 들어서 나는 저항 없이 길 위에서 혼자 웃고 말았다. 그는 몇 시간이 더 지나서야 나의 이별 편지를 받게 되겠지만 나는 이미 그와 나 사이에 이별을 던져버리고 그 관계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그렇게 그와의 연애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