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며시 잡은 손도, 키스도. 다 이렇게 자연스러웠던가?

모든 게 다 너무 오랜만이라. 나만 뚝딱거리지 아주?

by Invinciblesummer


"안녕. 오늘 하루는 어땠어? 혹시 저녁에 뭐해? 나랑 같이 산책할래?"


연락처를 건넨 다음날 퇴근 후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공교롭게도 다음날 다른 지역에서 일이 있어 기차를 타기 위해 짐을 싸던 참이라 나는 못내 아쉬웠다.


"아 어쩌지.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 내일부터 며칠 동안 다른 도시에 일하러 갈 예정이라 이따 저녁기차를 타거든. 혹시 그 제안 언제까지 유효해?"


"애석하게도 유효기간은 오늘 23시59분59초."


피식 웃음이 났다. "뭐야 전공이 마케팅이었어?"


"마감 임박 프로모션에 내가 좀 강한 편이지. 아쉽지만 그럼 다음 기회에."


귀여운 답장에 입꼬리가 씰룩거렸으나 잠시 답장은 미뤄두고 서둘러 짐을 쌌다. 어쩌나, 로맨스보단 일이 우선인 건 어른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걸. 기차에 앉고나서야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미안, 아까는 짐싸느라.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어. 너도 좋은 저녁 보내. ;)" 일 분도 채 안되어 답장이 왔다.


"뭐야? 아직 여기 있었던 거야? 이미 기차를 타고 가는 중인 줄 알았지! 그러면 우리 정말 산책할 수 있었겠는데?"

"하하 어떤 산책? 하이하자마자 바이하는 산책?"

"한 번도 해보진 않았는데 그러니까 더 재밌지 않았을까? 여태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기차역까지 함께 걸으면 어떨까 생각도 했는데 혹시 너무 로맨틱하게 들리면 어쩌나 해서."


문장 끝에 붙인 수줍어하는 이모티콘. 굳이 숨기지 않는 그의 솔직함이 좋았다. 언제나 명확한 걸 좋아하는 내게는 헷갈리지 않게 하는 그의 명확한 신호가 마음을 열게하는 요소들이었다.

기차에서 가는 동안 밀린 글을 좀 써야지 했는데 기차의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았다. 아이쿠 이걸 어쩐다? 어쩔 수 없지. 지금 걘 뭐하는지 연락이나 한 번 해볼까? '웃기고 있네. 와이파이 없이도 오프라인 저장을 하면 되잖아.' 진실을 말하는 마음 속 소리를 나는 애써 못들은 척 해버렸다.



"짠! 누가 돌아왔나 보라고!"

이틀간의 출장을 끝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집으로 가는 트램 안에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 트램 밖 풍경을 찍어 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방금 도착한 거야?"

"응! 나 집에 가는 길이야. 환영해줘!"

"지금? 15분 정도면 나 나갈 수 있어."

"응? 아니, 내 말은 Welcome! 하고 말해달란 거였는데. 지금 너무 늦었잖아."

"너네 동네까지 고작 1킬로야. 직접 가서 웰컴해줄 수 있어."

"아니야. 그래도 너무 늦었어. 내일 둘 다 출근도 해야하고."

"너만 원하면 나는 나갈 수 있어. 웰컴 드링크로 맥주 한 잔 사줄게. 싫어?"


싫을리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주는데 싫을리가.

"그래. 딱 한 잔만이야." "응. 거기서 보자."

밤 열 한시에 맥주 한 잔 하러 나가는 내 모습이 낯설다. 베시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자꾸만 감출수가 없는 내 모습이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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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메신저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만남은 꾸준히 이어졌다. 우리는 거의 매일 퇴근 후 만나서 석양을 보며 맥주를 마시거나 긴 산책을 했다. 그러다 주말 저녁이면 맥주 한 잔만 하자던 계획은 자정으로, 새벽으로 늘어졌다. 삼십대가 되고 나서 이런 적이 있었던가.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 빨리 흘렀고 집으로 가는 길은 아무리 늦어져도 아쉬웠다.


수족냉증 탓에 야외 카페에서 핫초콜렛 잔을 들고 있는데도 손이 데워지질 않아 손을 비비니 그가 "추워?" 물으며 손을 슬며시 잡는다. 생각보다 차가운 손에 깜짝 놀랐는지 "맙소사. 이렇게 추웠으면 안에 앉자고 하질 그랬어."하고 되묻는다. 실내에 앉기엔 풍경이 너무 예쁘지 않냐는 내 대답에 그는 그렇다면야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내 손은 여전히 꼭 쥔 채로.


처음 만났던 날 공원에서 맥주 컵을 쥔 그의 손에 자꾸만 눈이 갔었더랬다. 큰 키만큼 큰 손은 매끈하고 길쭉한 손가락과 짧고 단정하게 자른 예쁜 손톱까지 완벽했다. 그 큰 손등 위를 지나 팔뚝으로 이어지는 선명하고 굵은 핏줄. 게임오버. 저 손으로는 맥주컵을 쥐어도, 펜을 쥐어도, 뭘 해도 너무 섹시할 것 같아서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의 얼굴만큼 아름답던 그 손을 나는 그날 저녁 내내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그런데 그 손이 내 손을 맞잡고 있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너무 좋아하는 내 표정과 쿵쾅대는 마음을 들키기 싫어 나는 남은 한 손으로 식은 핫초코 잔을 더 세게 쥐었다.


핫초코가 바닥을 드러낸 후에도 우리는 헤어지기 싫어 도시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결국 딱 맥주 한 잔만 더 하자며 다시 펍으로 들어갔다. 새벽 세시까지 하는 운영 시간과 저렴한 맥주값 덕에 매일 밤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펍에서 우리는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작은 이인용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서로를 마주보게 놓여져있던 의자를 그는 내옆으로 옮겨 앉으며 말했다. "너랑 가까이 있고 싶어."


가까이서 보는 그 얼굴이 좋았다. 매끈한 피부, 잘 정돈된 수염, 내가 가장 좋아하던 남자다운 콧대와 귀여운 콧망울의 완벽한 조합, 초록색 눈동자까지.


긴장을 했던걸까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립밤을 꺼내 입술에 발랐다. "나도 써도 돼?" 내 립밤을 가져다 바른 그는 내게 립밤을 돌려주며 말했다. "완전 촉촉해. 한 번 만져볼래?"

그의 얼굴은 충분히 가까웠고,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그의 입술을 살짝 쓰다듬었다. 내 손을 잡으며 좀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말했다. "아니, 손말고." 우리의 입술이 서로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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