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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닉사라 Dec 11. 2023

고마운 네비!  하지만 너 없이도 다닐 수 있어.

길치, 방향치 탈출기

네비는 고마운 존재이다.


지독한 길치이고 방향치였던 나는

지도 보는 것도 서툴러서 자주 길을 헤매곤 하였다.

그래서 항상 다니던 길만 다녔고,

대학시절 누구나 한 번쯤 떠나는 배낭여행도

국내이든 국외이든

길을 잘 알고 지도를 볼 줄 아는 친구 동행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내었다.


휴대폰에 내비게이션 앱이 생기고 성능이 좋아지면서

지도나 약도가 없이도,

네비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폴란드로 옮겨 왔을 때는,

도로환경이 한국과 많이 다르고

폴란드어로 된 이정표도 너무 낯설어

시내로 차를 끌고 다니기가 두려웠다.


바르샤바의 시내 도로 표지판, 이정표나 노면표시 등

안내 표시가 썩 친절하지 않은 편이어서

지방에서 온 폴란드인들도 처음엔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  


그래서 폴란드에서는 운전 시 네비는 필수품이다.

나 같은 길치에다가 방향치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처음에는 네비를 사용해도 도로로 나가면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실제 거리감을 파악하기 어려워 헷갈리거나

엉뚱한 길로 진입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래도 꾸준함을 이길 게 없다는 말이 있듯이,

도로에서 시행착오를 으면서 계속 운전을 하다 보니,

폴란드 도로에서 네비 사용이 익숙해졌다.

어디를 가더라도 '네비만 있으면되었기에,

시내외 어디든, 초행길도 문제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자신이 길치이고 방향치임을 잊고 살았다.


그렇게 네비가 항상 내 곁에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만 같더니,

도로 한가운데에서 네비 작동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


바르샤바 시내 정경. 바르샤바 대학교 인근 도로




에피소드


몇 년 전 어느 날, 아는 지인과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갈 일이 있었다.

약속장소에서 지인과 볼 일을 마친 후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스마트폰 전원이 갑자기 꺼지는 것이었다!

배터리가 벌써 닳은 듯 재부팅도 안되었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바르샤바 내 지역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가본 낯선 곳이어서

집으로 돌아오려면 네비가 진짜 필요했다.

차에 장착된 네비는 늘 작동이 느리고,

업데이트를 하려면 카센터에 들러야 하는 번거로운 점 때문에

휴대폰의 네비가 유일한 나침반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차를 몰아야 할지 몰라 그 당혹감에

뒷목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재빨리 방향을 틀어 빈 골목길로 일단 들어갔다.

잠시 차를 세워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날도 어둑어둑한데 13km 남짓한 거리를

네비 없이 어떻게 운전해서 갈지를 생각하니 암담했다.

그때 마침 트램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길래

시동을 걸고 트램이 다니는 방향으로 차를 움직였다.

폴란드 트램은 주로 메인도로로 다니므로

그쪽 도로로 들어서기만 하면 어디든 갈 길이 보일 것 같았다.


과연 큰 도로로 나가니 이정표가 큼지막하게 보였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 인근 동네 이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정표에서 안내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운전했지만, 

회전교차로에서 길을 잘못 들고,

고가도로 진입로가 헷갈려 당황하기도 했다.


운전하는 내내 초보 운전자인 마냥

핸들을 꽉 쥔 손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네비가 있었다면 넉넉잡아도 40분 정도 소요되었을 총 주행시간이

1시간 이상으로 배로 늘긴 했지만,

무사히 집으로 도착했기에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기


음으로 폴란드에서 네비 도움 없이 운전한 날이 되었다. ^^

나에게는 큰 사건이었다.

네비 없이 목적지까지 도달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 당시에는 속수무책으로 울고만 싶었는데,

결국 해낸 것 자체가 참 신기하고 또 뿌듯했다.


'아~ 혼자서도 되는구나!'


불가능의 한계를 허물고 나니,

그 한계는 두려움에서 기인된 마음의 벽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차 안에서 패닉상태에 빠졌던 것도

네비 없이는 절대로 집에 못 돌아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의 정체를 알게 되고부터, 

정복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그 두려움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새로운 곳에 가면 어리둥절해하며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헤매는 것도 

어쩌면 그냥 나 스스로가 붙인 딱지일 뿐,

나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두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낯선 곳에 대한 왠지 모를 불안감을 극복해 보기로 하였다.


바르샤바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문화과학궁전




길치, 방향치 탈출기


우선, 아는 길을 다닐 때는 네비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잘 아는 길이라도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인지

무심코 네비를 켜는 습관이 있었는데,

켜두더라도 음성안내는 꺼놓고 다녔다.

그때까지 바르샤바 지리에 서툴었던 것도

처음부터 네비에 길들여진 때문이기도 하다.


또, 늘 다니던 길만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도 다녀보기로 했다.

책자로 된 바르샤바 지도도 처음으로 구입했다.

지도를 자주 펼쳐보면서 바르샤바 지리를 구석구석 익혔다.


출발 전에 목적지를 미리 지도에서 확인해 통째로 외우고

운전 시에는 이정표도 자주 눈으로 봐가면서

지도에서 미리 확인한 내용이 실제 거리와 비교해서 어떻게 다른지

동서남북 방향 중 어느 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신호등, 도로표지판, 큰 건물이나 그 거리의 특징을 눈여겨보면서

시야의 폭을 넓히려고 애썼다. 


그렇게 몇 년간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지금은 낯선 곳을 향하는 불안감, 두려움을 상당히 극복한 것 같다.

여전히 네비를 사용하긴 하지만,

안내해 주는 경로대로가 아니라

때로는 내 맘대로 경로를 바꿔 목적지를 향하기도 한다.


인터넷 연결이 잘 안 되거나 폰 방전으로 네비를 쓰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도

이제는 패닉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당연히 좀 헤매기는 하겠지만,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긴 점이 가장 큰 변화이다. 


물론, 네비를 켜는 순간 어느 길을 택할지 고민하거나 헤맬 필요가 없이

경로대로만 따라가면 안전하게 신속하게 도착할 수 있을 터이다.

네비가 제공해 주는 이런 편의와 도움이 고맙긴 하지만,

이를 너무 믿고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지 않기로 했다.


네비에 나의 선택권, 결정권, 통제권까지 내주지는 않을 거다.

왜냐하면...

내 삶의 방향키는 내가 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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