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을 멈출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아무리 음식을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프다.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자꾸 먹고만 싶다. 애써 식욕을 참고 꾹 먹고 싶은 마음을 눌러보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에는 오로지 음식 생각뿐이다.
떡볶이, 피자, 아이스크림, 케이크, 크림치즈 파스타…
안돼, 참아야지.
아까 밥 먹었잖아,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어제 늦게 밥 먹었잖아. 그러다 또 살이 뒤룩뒤룩 찔 거야.
좀만 참고 이따 먹자.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아서 그래.
이럴 때일수록 자기 계발을 하자. 아무것도 안 하니까 자꾸만 더 음식 생각이 나는 거잖아.
하는 게 뭐가 있어 먹는 것 밖에 더 있어? 식량만 축내는 이 식충이 같으니라고.
스스로 증오하며 책 한자를 더 보려고 독서에 뛰어든다.
다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스스로의 생각을 억누르고, 또 억누른다.
잘했어. 역시 통제하면 된다니까?
식욕은 의지의 문제였어.
그렇게 식욕이 잠잠해지는가 싶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온통 음식 생각뿐이다.
일어나자마자 초콜릿을 먹고, 냉동실에 얼려둔 슈크림빵을 먹자. 저녁에 자기 전에 먹으면 아침에 얼굴이 퉁퉁 부어있을 테니까. 참자. 참자. 좀만 참자.
다짐을 하고 또 해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어온다. 분명 먹을 것에 대한 계획을 세웠는데도 왜 불안감은 사그라들지 않는 걸까. 눈을 감으며 애써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호흡하며 이완하려고 해도 불안감만 치솟고 심장이 두근대며 각성된다.
결국 냉동실로 직행해 쟁여놨던 아이스크림 한통을 15분도 채 되지 않아 거뜬히 비워낸다.
게눈 감추듯 사라진 아이스크림 빈 통을 덩그러니 바라보면서 자책과 수치심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폭식을 할까?
우리는 대개 스트레스를 받으면 달고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이 당겨진다. 삶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세로토닌 수치가 낮아지는데 그로 인해 뇌에서 혈당을 높여줄 음식 갈하게 함으로써 세로토닌을 분비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한 번쯤은 풀고 싶고 다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한두 번 과식하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폭식만이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폭식하는 것은 심리적 허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사람들은 오늘도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찾아 나선다. 수많은 SNS와 미디어를 통해 먹방을 시청하며 허기를 달래보기도 하고, 넘쳐흐르는 식욕을 억지로 꾸역꾸역 참고 참다 한꺼번에 여러 개 음식을 배달시켜 흡입한다.
스트레스를 일상 속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는지 알턱이 없다. 그저 바로 앞에 있는 음식을 통해 마음의 빈 공간에 욱여넣고 또 욱여넣어서 어떻게 서든 텅 빈 마음을 채우려고 한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이 항상 나도 모르게 존재한다.
그 위험한 결핍의 신호를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마치 음식은 우리의 삶 모두를 집어삼켜 지배하는 형국이 만들어진다.
항상 음식에 집착하고 중독되며 거식과 폭식을 넘나들면서 음식에 사로잡혀 현재의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결핍되었다는 신호.
삶 속에서 만족스럽지 않고 충분히 채움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내면에서 뭔가 자신이 기대하고 바란만큼 채워지지 못해 좌절된 것들이 쌓이다 터졌다는 신호다.
가짜 배고픔 vs 진짜 배고픔
가짜 배고픔은 스트레스나 외로움, 분노 등 주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을 때 배고픔의 신호가 울린다고 한다. 부정적인 감정의 처리 부족으로 인한 세로토닌 분비 저하로 신체에서 다시금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배가 마구 고파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가짜 배고픔이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허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심리학, 정신의학, 영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내면을 돌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참을 수 없는 식욕이 오른다면 현재 나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를 돌아보고 그것을 다루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결국 폭식이든 거식이든 식이장애의 치료는 그 방향을 지향하며 나아간다.
그러나 나는 식이장애를 회복하는 여정을 거치면서 한참 딜레마에 빠졌었다.
폭식과 거식, 이러한 식이장애가 결국 내면의 결핍에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가짜 배고픔이든 진짜 배고픔인지 그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냐는 것이다.
어찌 됐건 우리는 배가 고픈 것이 아닌가.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어쨌거나 먹고 싶은 것이 아닌가.
물론 섭식장애 수준까지 오지 않은 혹자들에게는 가짜 배고픔과 진짜 배고픔을 구분해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건강의 균형을 맞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폭식과 거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짜 배고픔과 진짜 배고픔을 구별해서 의지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과연 근본적인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까에 대한 의문점이 있는 것이다.
심리적 허기짐이 올 때 내면을 들여다보고 수용해준 후 음식을 먹고 싶어도 마냥 참는 것은 비록 식이장애 치료를 위해 한 과정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더 깊은 차원에서 거식과 폭식을 양산하게 된다. 오히려 치료를 위한 절차라고 스스로 여기면서 결국 음식을 절제하고 먹지 않으려고 하는 거식의 욕망이 아주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먹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은 억압을 가져오고 언젠가 반드시 폭식으로 터지게 된다.
나는 식욕이 심리적인 결핍과 허기짐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여 먹고 싶던 욕망을 잠시 뒤로 한채 내면을 돌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는데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음식 생각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기분도 전보다 편안해진 것 같았다. 음식에 더 이상 지배당하지 않고 음식 생각으로 괴롭지도, 하루 종일 음식 생각만 하느라 머리 아프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 스스로 컨트롤되지 않을 정도로 식욕이 배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제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 봉지면 끝날 음식을 세 봉지째 먹고 나서야 한동안 그 음식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 번의 반복된 실패 끝에 깨달은 것은 심리적 허기를 느끼는 자신을 인지하면서 그런 자신의 내면을 바라봐주고 돌보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과, 잘 되지도 않는 마음을 수용하려고 억지로 애쓰면서 식욕을 달래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나는 심리적이건 신체적이건 중요한 것은 어떠한 허기든 그것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반겨줘야겠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부터 하게 되었다. 먹고 싶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음식을 꾸준히 먹어주는 것이 회복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 됐건 허기는 허기고 나는 그만큼 오랜 기간 음식에게 굶주렸으니까.
반면 심리적인 부분을 전혀 해소하지 않고 먹기만 하는 것 또한 폭식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폭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신이 못마땅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밉고 증오심이 불타올라 그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 또 폭식을 한다. 굶고 폭식하고 또 굶고 폭식하고. 이를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자기 증오의 동굴로 똬리를 틀며 들어가는 것.
나는 거식으로 굶고 참다가 한꺼번에 폭식하고, 또다시 거식의 사이클을 도는 것을 막고 싶었다.
위와 같은 사이클 속에 내재된 핵심감정은 “증오”였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식했고, 너무 허기가 지고 공허해서 폭식을 했다. 그러다 폭식하는 내 모습이 수치스럽고 그런 내가 죽고 싶을 만큼 싫어서 또다시 몸과 마음을 클렌징해야 된다는 생각에 거식을 감행했다.
어쨌건 항상 섭식장애의 시작과 끝은 자기 증오에서 자기 증오로 끝이 났다.
폭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폭식을 당장 그만두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폭식을 하고 있는 “자신을 증오”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폭식을 벗어나기 위해 폭식의 행동을 안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폭식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해주는 것이다.
‘또 폭식했어’
‘어우 지긋지긋해. 엄청 처먹었네’
‘이런 내가 정말 싫다.’
사실 이런 자기 비하적이고 증오심으로 가득 찬 말을 수용하는 과정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 나를 보기 힘들고 마냥 억압한 채 폭식을 감행한 적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러한 내 모습을 수용하는 것 것조차 버거웠고, 그 버거운 마음을 갖는 내가 또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미워하고 깎아내리는 그 습성을 하루아침에 버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폭식하고 거식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나부터 수용하기로 했다.
“수용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하지.
얼마나 그 오랜 세월 너를 미워했는데
그게 어떻게 단번에 수용이 되겠어”
수용이 안 되는 나 자신을 먼저 수용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섭식장애를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자신을 증오하는 습관에 중독적으로 빠져버려서 나와 같이 자동적으로 증오를 하고 있는 상태라면 폭식 후 자학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며칠 후에 다시금 생각이 난다면 그것 만으로도 스스로에게 고맙다고 격려해주자. 어쨌든 바로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나중에라도 알게 된 것이니. 점점 인식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그 인식하는 시기 또한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