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글을 발견했다. 어느 문화 비평가가 2007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로, 장한나가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한 것을 비판한 글이었다. (오래된 글이고 이제는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해당 글과 평론가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장한나가 어린 시절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우승을 할 정도의 신동이었지만, 지금(07년 당시)은 나이가 25세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공부는 음악이 아니라 첼로 자체에 대한 공부를 말하는 것 같다.) 첼로에 더 정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 인터넷 상의 여러 클래식 카페에서는 장한나에게 '첼로나 잘하라'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것은 음악 팬으로서 장한나의 첼로 연주를 자주 접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젊은 여자가 무슨 지휘'라고 하는 남성우월주의적인 목소리였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게 된 이 기고문도, 유명 연주자와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그리고 철학자, 시인을 대거 동원해서 글을 포장했지만 그의 본심 역시, '첼로나 잘하라'였다.
내가 보기에는 장한나를 안타까워하는 이 비평가와, 설득력 있게 글을 잘 썼다고 칭찬 댓글을 다는 사람, 또 이 글을 퍼다가 자기 블로그에 자랑스럽게 올린 사람들 모두가 더 '안타까워' 보였다.
연주와 음악 사이
"음악은 나누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음악을 수단으로 생각하면 절대 안 돼요."
(장한나 인터뷰 中)
연주자는 악기를 통해서 음악을 만나고, 관객과 소통을 한다. 즉, 악기는 음악과 관객으로 연결되는 수단인 것이다. 악기가 삶과 음악이라는 목적을 대치해서는 안 된다.
장한나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일반 연주자들과 달랐다. 악기의 기술적인 훈련과 더불어,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인문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 했고, 그래서 하버드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달리 레퍼토리에 제약이 있는 첼로로는, 그 넓은 음악의 바다를 자유롭게 탐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점의 차이인데 첼로라는 '악기'에 매몰되지 않고, '음악'이라고 하는 더 큰 세계를 이해하려는 의지로 해석해야 한다. 한 연주자가 어린 시절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긴 음악 인생을 어느 한 가지 악기를 중심으로만 평가하고 획일적으로 구속해서는 안 된다.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여정을 밟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그 연주자 본인의 고유 권한이다.
이제 장한나는 최고의 첼리스트에서, 평범한 지휘자의 자리로 내려왔다. 지금으로써는 그녀가 지휘자로서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느 순간 지휘봉을 내려놓고 다시 첼로 연주를 하며 그간의 경험과 통찰을 노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결과를 예단하지 말고, 그녀의 음악이, 그녀의 삶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기대하며 지켜보면 될 일이다. 지휘자로서도 실력으로 인정받겠다는 당찬 의지로, 끝없는 도전을 하고 있는 그녀의 음악 여정을 응원한다.
불행을 가장한 축복
장한나와 더불어 함께 언급하고 싶은 또 다른 연주자가 있는데, 요즘 유튜브에서 한창 인기를 올리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다. 그녀도 15세에 비에니아프스크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2위 수상을 하고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을 해왔다. 한수진도 장한나처럼 대학에서 악기를 전공하지 않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음악학을 전공했다. 전문 연주자가 음악학을 전공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인데 그녀 역시 연주자로서 음악에 대해 더 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수진은 어린 시절부터 유전병으로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2012년에는 어릴 적 다친 턱의 상태가 악화되어 6년 간 여러 차례 수술과 재활을 하느라 연주 활동을 거의 중단하기도 했다. 가장 바쁘게 명성을 쌓고 있어야 했을 전성기에 허무하게 흘려보내는 6년이라는 시간은 큰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수진은 인생에서 장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장애가 오히려 자신의 삶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음악의 세계에서는 독창성이 가장 중요하죠. 저는 제 청력 문제를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MBN 포럼 2020 강연 중)
한쪽 귀가 들리지 않으니 모든 소리를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로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예민하고 색다른 청음 감각을 길러주었다고 했다. 20대 중반에 턱의 통증이 심해져 수술을 받고 나서 연주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해양 생물 연구를 돕고, 화장품 판매, 웹 디자인, 통역 등의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다른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사람과 일에 대한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뼈저리게 깨달았죠. 세상에는 음악만큼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건 없구나!"
(조선일보 인터뷰 중)
2018년 다시 연주를 시작한 한수진은 이제 무대에서 고독하게 연주만 하는 전형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모습과는 다른, 관객과의 소통, 나눔의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따뜻한 연주자, 아니 음악가가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음악과 삶의 이야기로부터 얻는 감동
세계적인 첼로 연주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새롭게 지휘자의 길을 걷고 있는 장한나, 그리고 청각 장애와 6년이라는 긴 재활의 시간을 극복하고 인간적으로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돌아온 한수진. 이 두 사람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서, 단순히 소리로 전달되는 음악의 감동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삶을 완성해 가는 이야기의 감동 또한 얻게 된다. 이런 삶의 도전을 통해 그들의 음악이 얼마나 더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질지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의 팬으로서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연주자의 연주 능력만으로 그들의 음악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