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영화 '낙원의 밤'
[1]
술자리에서 한 여자 사람 친구가 대학 때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보고 싶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땐, 유치원생들처럼 서로 자기 얘기만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지들 얘기만 떠드는데도 밤새 수다가 계속된다는 거지."
"그러게. 그때는 내 얘기 안 들어준다고 짜증나기도 했는데...
그 순간들이 기억이 많이 나네. 정작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말이야."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 없는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관계였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계발서를 읽어가며 설득과 공감의 기술 따위를 익히려 애쓰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친밀했다.
인생에서 소중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으니 밤새 나누는 수다의 무게만큼이나 우연한 친밀함의 무게는 가볍기만 하다. 아니 반대로, 소중한 관계만큼 수다의 무게가 무겁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하룻밤에 흘러가 기억에 남지 않아도, 그 순간이 위로가 되고 추억이 되는 친구들의 수다는 가볍지 않다.
[2]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근황을 묻다가, 나는 어려워진 회사 사정을 얘기하며 넋두리를 했다.
"회사 다니는 게 힘드네. 이제 더 올라갈 가망도 없고..."
"하하, 그럼 그냥 다니면 되지."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가벼웠지만 내 고민의 무게를 단숨에 들어 올릴 만큼 묵직한 말이기도 했다. 회사에서의 힘든 상황도, 상대적인 박탈감도, 무너진 자존감도 그냥 지금 그대로 두고 보아도 된다고,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의미 없이 웃고 떠드는 친구들과의 수다만큼이나, 깊이 걱정해주며 건네는 따뜻한 말만큼이나 마음으로 전달되는 말이었다. 마음으로 전달되는 말은 논리적인 말보다 강하고 무겁다.
그날 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내내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3]
영화 '낙원의 밤'에서 주인공 태구와 재연은 각자 다른 사연으로 죽음을 앞에 둔 시한부 인생이다. 1분 1초가 치명적이고 소중한 이들에게도, 우연한 만남에서 학창 시절 친구와 같은 친밀한 우정이 생길 수 있을까?
#1. 차 안에서
"근데 너 왜... 말이 자꾸 짧다. 왜 말 까니? 나이도 어린 게."
"하여간에 꼰대들은... 꼭 할 말 없으면 나이 갖고 지랄하더라. 쌀 많이 축낸 게 무슨 자랑이라고.
내가 나긴 너보다 늦게 (태어) 났어도 죽는 건 너보다 훨씬 빠르거든. 그러니까 말 좀 까도 돼. 억울하면 먼저 죽든가."
#2. 재연의 삼촌이 살해당한 후
"괜찮냐?"
"미친. 괜찮겠냐?"
"아니."
"나는 그러구 뻔히 안 괜찮은 거 알면서 괜찮냐고 묻는 새끼들이 제일 싫어. 그냥 할 말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든가. "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굳이 상대방을 배려한 예의 같은 건 거추장스럽다. 말의 형식은 공격성을 띄고 있지만 영화 속 장면의 맥락은 서로에게 무장해제를 갈구하고 고백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감출 것이 없어.'
일주일이라는 (어쩌면 남은 인생 전부일지도 모를) 긴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에겐, 서로 어떤 말을 하든 어떤 눈 빛을 주고받았든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깊이 새기는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조직에서 배신을 당하고 보스의 손에 죽어가는 태구는 이 가벼운 농담을 죽음 앞에서도 다시 꺼내어 놓는다.
#3. 태구가 죽어가는 순간, 태구와 재연의 대화
"왜 울어? 쓸데없이 울지 마라."
"안 울어. 네가 뭔데. 누가 너 때문에 운다고 그래."
"너 말 까지마. 이제는 죽는 것도 내가 먼저다. 쪼끄만 게."
"쪼잔한 새끼. 계속 그 생각하고 있었냐? 웃기지 마. 그래 봐야 며칠 먼저 가는 건데."
"내가 너 그딴 식으로 말할 줄 알았다." (웃음)
죽음을 앞에 두고, 얼마 되지 않는 짧은 대화를 추억하는 것이 인생 전체를 회상하는 것만큼이나 소중해 보였다. 너와 나눈 말장난이 더 중요하다고, '그딴 식으로 말할 줄 안' 너의 그 말이 다시 듣고 싶었다고. 그래서 죽는 건 아무렇지 않다고.
죽음의 찰나에 나누는 농담은 삶의 무게만큼 가볍지 않다.
[여담]
태구가 죽고 난 후에 이어지는 피가 낭자한 살인 장면과 재연의 무자비한 복수 장면은 오히려 영화의 에필로그처럼 가볍게 느껴질 만큼, 마지막 태구와 재연의 대화는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영화 후기를 좀 찾아보니 놀랍게도 비판 일색이었다. 특히 누아르 팬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
'낙원의 밤'을 누아르 장르의 틀에 맞춰 해석을 하려고 하면 두 주인공의 대사와 제주도의 풍경은 맥락이 없어 보인다. 치열한 계략과 음모도 없으며 그렇다고 대단한 남자들만의 의리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실망할만 하다.
감독의 이전 작품 '신세계'가 무간도와 몇몇 영화들의 짬뽕이라고 많은 비판을 받은 상황이니(물론 흥행도 했지만) 굳이 '낙원의 밤'에서까지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누아르 팬들에게는 또 한 번의 큰 아쉬움이었나 보다.
장르에 대한 집착을 조금만 내려놓고 보면 이 영화는 상당히 다른 영화로 읽힐 수 있다. 나에게는 이 영화의 허술한 누아르적 장면과 서사 방식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치 인터스텔라가 SF 장르를 차용한 가족의 사랑 이야기였듯이, 내가 본 '낙원의 밤'은 누아르의 형식을 차용한,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누아르라는 장르는 내용의 폭력성을 넘어 이젠 '누아르라면 이래야 한다'는 규범적 폭력성까지 지니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누아르의 무게보다 사랑의 무게가 더 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