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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01. 2020

택시에서 내 취향을 확인해 보다.

타인의 취향에서 벗어나 보기

지하철역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려다가 출장가방에 재킷을 넣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집으로 다시 뛰어갔다. 대충 아무거나 집어서 넣고 나왔지만 제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하기는 애매했다. 얼른 택시를 잡았다.


택시가 좁은 길을 벗어나 강변도로에 들어설 때쯤에야 거친 숨이 잦아들었다. 택시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서늘했다. 강변도로에 들어서자 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올리고 라디오를 틀었다.


'93.1 MHz KBS 제1 FM'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2악장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대학시절 아쉬케나지의 연주를 듣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던... 나름 나에게는 추억이 있는 곡이다.


손님에게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는지 기사 아저씨는 볼륨을 낮게 맞추어 놓았는데 작게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 기울이고 듣는 음악도 나쁘지 않아서 나도 볼륨을 높여달라고 청하지 않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공연 음반인 듯했다. 아날로그로 녹음한 상당히 오래된 공연인 것 같았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좀 이상했다. 오케스트라 반주는 산만하고 피아노 연주도 맘에 들지 않았다.


93.1 MHz에서 틀어주는 곡들은 기본적으로 검증된 유명 음반인 경우가 많다. 새 음반이어도 유명 연주자이거나 화제가 된 것들이다. 특히나 아침방송은 귀에 익은 곡들을 중심으로 선곡을 하기 때문에 가끔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언정 연주에 문제를 삼은 적도 없고 나 같은 썩은 귀로 그런 불평을 하는 게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연주는 달랐다. 2악장에서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화음 위로 목관의 깊고 애통한 상실감을 토해내주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무관심한 듯 흘러갔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3악장이 시작되었다. 심포니 9번의 피날레처럼 강렬한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건반의 타감을 예상했지만 역시 이 연주자는 너무 냉정했다. 마치 해방해야할 슬픔도 좌절감도 없었다는 듯.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연주가 끝나자 진행자의 멘트가 나온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피아노,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였습니다."


아침부터 재킷을 챙기러 집에 뛰어갔다 와야 할 때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쇼팽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해 준 폴리니 아저씨의 연주였다니! 폴리니의 피아노가, 베를린 필의 연주가 허접할 수는 없을 텐데 내가 그 연주에 짜증을 내버리고 만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얼른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비평만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와 대화를 나누는 목관은 깊이가 부족하다."


묘한 쾌감이 들었다가 이내 헛웃음이 나왔다. 음악을 듣고 나서 내 생각과 느낌이 남들과 다를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래식 좀 듣는 사람인 척 살다가 KBS 제1 FM이라는 '절대 권위'에 반하는 생각을 했으니 더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아직도 사춘기적 감상에서 못 벗어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취향에는 베토벤 연주가 기계처럼 들어맞는 정확성보다는 다듬어지지 않았더라도 절망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열망이 담겨 있을 때 더 좋다.


예상치 않은 택시비 지출은 있었지만, 덕분에 타인이 원하는 취향이 아니라 나의 진짜 취향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단돈 만 오천 원에 말이다.


폴리니 아저씨,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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