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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an 22. 2024

믿음의 속셈

속셈하는 기독교인

사칙연산은 덧셈, 곱셈, 나눗셈 그리고 뺄셈이 있습니다. 

이것을 마음속으로 셈하는 것을 ‘속셈’이라고 합니다.


속셈의 셈은 [암산]입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이전 시절)’시절에는 주산을 가지고 수업하는 것이 학교 수업 시간에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수학의 구구단과 암산을 빨리하는 것을 영재와 천재의 시작으로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속셈은 산수만 암산하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면 속셈은 ‘전략적 의도‘라는 말로 사용되고, 교회나 기업에서는 비전, 미션 혹은 사명이라는 단어로써 사용됩니다. 

대부분 ’ 암산‘이 ’ 잔머리’을 돌리는 속셈으로 사용됩니다.

잔머리 속셈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서 자신과 사람들을 속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도 헌신의 속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저녁에 붙들려 십자가 처형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치열하게 속셈하면서 누가 높은가에 대해서 서로 잔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눅22:20-24, 새 번역]
20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21 그러나 보아라, 나를 넘겨줄 사람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22 인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자기들끼리 서로 물었다. 24 제자들 가운데서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는 물음을 놓고, 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주님은 자신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성만찬을 하셨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유대 제사장에게 넘길 제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가 누가 그럴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그들의 결론은 가장 낮은 사람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잔머리를 굴리면서 갑자기 누가 제자 중에 큰 자인가로 주제가 바뀝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 나를 팔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만, 제자들의 주제는 누가 높은가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항상 저지르고 있는 죄악의 속셈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선교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위치와 나의 권리를 생각합니다.

회개의 간증을 하면서 나의 선함과 신앙인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정작 구하는 것은 종교적인 나의 포지션입니다.

그래서 헌신할 마음은 없지만 집사와 장로직에 마음에 갑니다.

신앙생활을 나의 믿음 생활로 바꾸어서 종교인이 됩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지 않게, 주님이 나에게 미션을 주지 않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마치 태양계의 명왕성처럼 주일마다 교회는 다니지만, 적정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종교와 세상의 일은 경계선을 유지합니다.

우리들의 속셈은 꿩 먹고 알 먹고,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구원받는 것이죠. 좋은 것이 좋은 것, 윈-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이라는 하나님의 잔을 받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의 비어있는 잔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이 교회에 계시기만을 바라고 나의 가정과 직장에서는 마주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속셈 신앙입니다.


우리의 사역에 예수님이 돕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우리가 참여해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속셈은 무엇인가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고, 구했을 때 그들이 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함께하는 믿음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위치가 더 올라가기를 그리고 종교적 위치에 걸맞은 믿음을 원했을까요?

우리가 믿음을 구하는 속셈은 헌신인가요? 아니면 성공인가요?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기도하는 집인가요? 아니면 기독교 속셈학원인가요?


예전에는 누가 들어도 놀랄만한 비전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예전에 [기독교 1만 개 기업을 돕는 회사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창조주 하나님과 격에 맞는 크고 담대한 기도제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 판을 크게 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 나의 명예와 의를 위해서 이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역에 주님을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에 우리가 참여하여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우리 자신이 사용돼야 합니다. 

내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인이기에 계속 ’ 속셈’을 합니다. 

이 속셈을 멈추는 방법은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의 마음을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기도 제목을 포장하지 말고 숨기지도 말고 그대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마 26:39, 새 번역]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아버지께 나의 속뜻을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은 속셈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큰 의무감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저의 기도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시험들 것입니다. 그 정도로 민망하게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오픈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내가 진짜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스스로 봅니다. 이런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기도를 멈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속마음을 그대로 구합니다. 그러면 모든 기도는 모두(?) 응답받습니다. 하나님에게 응답받는 것도 있지만 제가 구하는 것의 대부분이 우상에게 구하는 잘못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 나의 속셈을 위해서 하는 기도이고,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사칙연산 중에 무엇일까요? 

기도 응답을 받아서 30, 60, 100가 되는 곱셈일까요? 

믿음을 더하여 받는 덧셈일까요? 

은혜를 나누는 나눗셈? 


저는 뺄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뜻을 빼는 기도, 주기도문만 남는 뺄셈 기도.

나의 것을 모두 빼십시오, 남아 있는 주님의 것으로만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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