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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Nov 06. 2024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듦의 계절, 인디언 서머(4)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 3막 1장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불운의 화살과 투석을 마음속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가)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맞서 싸워 그것들을 끝내는 것이 더 고귀한가)

 to die, to sleep; No more; and by a sleep, to say we end The heart-ache, and the thousand natural shocks That flesh is heir to?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 그리고 그 잠으로써 우리가 가슴의 아픔과 육신이 물려받은 수천 가지의 고통을 끝낸다고 말할 수 있다면?)
 
'Tis a consummation Devoutly to be wish'd.
(이는 간절히 바랄 만한 결말이로다)


누가 인생을 단순히 ‘2막’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중장년이 되면 매년이 새로운 막처럼 느껴지고, 그 안에서 예상치 못한 전개와 절정이 펼쳐진다.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에서 은퇴하고, 마치 인생의 큰 장을 마무리한 것 같지만, 사실 조퇴한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은퇴자는 인생의 두 번째 막에서도 여전히 ‘사느냐 죽느냐’라는 문제에 직면하며 다시 일자리를 찾게 된다.


인생의 1막에서는 직장인으로서 중심 무대를 차지했던 주연 같은 존재였다면, 은퇴와 함께 주연 자리를 내려놓는 것은 물론, 이제는 내 인생에서조차 조연도 아닌 배경 속 인물(Background performer,배경 연기자/행인)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 놓인 이유는, 우리 대부분에게 은퇴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대본’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스스로를 인생의 주연이라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한 번 진지하게 이 질문을 마주해 보자.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우리는 종종 직업과 직책, 그리고 직위로 자신을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은퇴 후에는 임시직이나 일용직으로 스스로를 설명해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할까? 사실 이 질문이 가지는 진정한 답은 단순히 직업적 타이틀이 아니라, 은퇴 후 내가 누구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가벼운 농담으로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로 답을 마무리할 수는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인생의 ‘2막’을 여는 독백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기에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뇌의 모든 기능을 비가역적으로 상실한 상태, 즉 뇌사이다. 그렇다고 일하지 않는 사람이 모두 죽은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직장에서의 역할이나 직업을 나의 정체성으로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설명하고 인정하며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지인 중에는 풍족한 노후 자금을 가지고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도 몇 있다. 나는 그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일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을 삶의 전부로 여겨온 탓에 그 질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렇게 묻는다.


“더 이상 돈이 없다면, 너는 누구인가?”


평생 일하지 않는 자신을 그려본 적이 없듯, 돈이 없는 자신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그들은 대답을 찾지 못하거나 회피하려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할 수 있다면, 그 질문의 답은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기회를 얻지 않는다. 질문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이 일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장년에 접어들고, 은퇴를 준비하거나 이미 은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앞으로 남은 최소 40년을 이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스스로를 알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가?”


혼자 있는 시간, 우리는 가장 나다운 행동을 할 수 있는 순간이다. 사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유튜브나 각종 SNS, OTT 서비스를 통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시청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낸다. 막상 자신을 직면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깊은 감정과 생각, 소망과 느낌을 마주할 수 있다.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나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오히려 두려워한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를 깊이 고민하는 것조차 꺼리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를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미를 모르면 내 가치를 이해하기 어렵고, 나의 가치를 모르면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우리 대부분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타인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복사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거나 직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왜 우리는 자신을 잘 알지 못할까? 이유는 놀랍도록 간단하다.

우리는 그동안 돈에 의해 자신을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준이 ‘돈이 되는가?’였으며, 우리는 세상과 자신을 이런 관점으로 평가해 왔다. 직장과 직업에서 비롯된 ‘돈’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기에, 일을 그만두게 되면 모든 기준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듯한 혼란을 겪게 된다.

일할 때는 일하는 시간이 있었고, 일하지 않을 때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이를 흔히 워라벨(Work-life balance)이라 부른다. 여기서 ‘워크’는 명확하게 이해되지만, ‘라이프’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오락과 취미를 포함한 모든 것을 라이프로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 진정한 라이프란 무엇인지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일(Work)과 삶(Life)의 균형을 맞추기 전에, 우선 삶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Life’는 Learning Innovation for Evolution의 약자다. ‘진화(Evolution)’는 진정한 내가 되는 과정을 뜻하며, ‘혁신(Innovation)’은 나다움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방법과 사고의 전환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내게 삶이란 나를 나답게 만드는 혁신을 배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정의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을 때 진정한 나를 찾는 일을 한다.


앞서 말했듯이, 각자가 나답게 진화할 수 있는 혁신의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글쓰기다. 내가 되는 글쓰기란 글을 잘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스스로를 찾는 글쓰기에서는 글의 주제를 정해두지 않고, 글을 통해 마음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나가며 써 내려간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이렇게 쓴 글들을 모아 다시 읽어보면 비로소 내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발견할 수 있다.


나답게 되는 것이 진화라면, 글쓰기는 나를 진화시키는 혁신 중 하나이다. 이러한 생각과 정의는 내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이다. 나만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는 나답게 성장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의미심장(意味深長)’이란 말은 깊고 오래 남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단어의 원래 의미보다도 ‘의미가 심장을 뛰게 한다’는 새로운 정의가 더 와닿는다. 그래서 나는 ‘의미심장(意味心臟)’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의미가 있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심장(意味心臟)’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의미심장한 일을 한다. 마치 시추 장비의 해머가 시추 기둥을 타격할 때 울리는 소리처럼, 혼자 글을 쓰려고 할 때 내 심장은 힘차게 두근거린다.


To write or not to write, that is the question.

전문 작가에게 글쓰기는 삶과 죽음(먹고 사느냐 굶어 죽느냐)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내게 글쓰기는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에 가깝다. 나는 강의 중 수강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당신은 2020년 11월 6일에 존재했나요?”


이 질문이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독자도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대부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진 앱을 열어 그날의 사진을 찾아보거나, 스케줄과 메일을 확인하면서 그때의 흔적을 되짚는다. 그러나 그날의 존재를 증명할 자료가 없는 수강생들은 나에게 다시금 물어온다. 그럴 때면 나는 메일 작성하는 일기를 보여주며 내가 존재했던 증거를 제시한다.


나에게 글쓰기는 내가 존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나의 활동 그 자체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다. 글은 나만의 증거일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것조차도 내가 여기에 존재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행위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글쓰기는 인간의 직립보행과도 같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통해 손이 자유로워졌고, 이를 통해 도구를 다루며 예술과 같은 창의적 활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리하는 도구이다. 언어와 문자는 인간이 추상적 사고와 창의성을 실현하고, 이를 공유하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생각을 피하려는 현대인에게 스스로와 대면하게 만든다. 인간의 직립보행이 우리를 자유롭게 이동하게 해 주었듯, 글쓰기는 우리가 생각하고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도록 해 주는 도구이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에 길들여진 우리는 생각하는 글쓰기보다 무의식적으로 동영상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인디언 서머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해외여행보다 글쓰기를 권한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인디언 서머를 맞이한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글쓰기나 자기 성찰을 사치나 시간 낭비로 여긴다. 이는 결국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삶을 채워온 것들이 주로 외부적 목표와 타인의 기대였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사느냐 죽느냐, 즉 “To be, or not to be”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고민할 때다. 만일 은퇴 후에도 죽느냐 사느냐에 매달리며 산다면, 지금까지의 삶보다 훨씬 더 고단한 여정을 겪게 될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글쓰기는 40대라면 지금, 50대라면 늦지 않았고, 60대라면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시작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5막 2장에서, 햄릿의 마지막 대사는 “The rest is silence (남은 것은 침묵이로다)“이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는 질문에 침묵(죽음)으로 답했지만, 그 침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나에게는 To write or not to write, that is the question이다. 자기다움을 찾는 글쓰기는 침묵이 아니라 존재를 남기는 일이다. 혹자는 글쓰기가 번거롭고 귀찮다고 말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이 살아온 삶이 번거로웠기에 글로 남길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The rest is nothing”이라며 마무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본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남은 시간 동안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다움을 글로 남길 필요가 있다. 기억은 사진으로 남길 수 있지만, 내가 된 나 자신은 글로 남긴다. 인디언 서머에 쓰는 글은 남이 만들어준 대본이 아닌 내가 쓰는 대본이 된다.


The rest is writing.





“존재하느냐, 사라지느냐, 은퇴 뒤 찾아오는 숙명적 질문이로다.

타인의 그림자 속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나를 찾아 나설 것인가?

이제 직장의 껍데기를 벗고, 진정한 자아의 물결 속으로 뛰어들 때.


돈과 지위로 나를 치장하던 세월은 흘러갔으니,

고요히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 바로 지금이로다.

심장은 여전히 뛰나, 의미 없는 외면을 이제 버리리라.

억눌렸던 목소리를 따라, 진정한 나를 향해 나아갈 용기,

오직 나만의 대본을 쓰는 힘이 필요한 때로다.


혼자 남은 시간, 어둠 속에서 내 영혼은 비로소 깨어나리.

스크린이 아닌 백지 위에, 감춰왔던 나의 이야기를 새기리라.

타인이 준 대본을 찢어내고, 나만의 기록을 시작하리니.

이제 남은 것은, 나를 남기는 글일지니라.


침묵 속에 잊힐 것이 아니라, 글 속에 흔적을 남기리.

이 인생의 마지막 여름날에,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도다.

The rest is writing, 남은 것은 글이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fated question after the dusk of toil.

Shall I linger as a shadow cast by others’ gaze,

Or shall I set forth, seeking the undiscovered self?

Now is the time to shed the shell of work and title,

And dive into the waters where my truest self awaits.


The years adorned with wealth and status are no more;

It is now the hour to gaze within, to find that silent heart still beating,

And cast away the empty trappings of outward show.

To follow that long-repressed voice, to dare seek the courage

Needed to script a path that is mine alone.


In solitude, I awaken to my spirit’s call,

No longer content with screens, but drawn to the blank page,

To etch the stories long hidden within.

I tear away the script handed down by others,

And now, begins the story solely mine to scribe.

The rest is writing; what remains, let it be carved in the ink of my existence.


Not into silence shall I fade, but in words shall my presence endure.

In this last summer of life, the choice is ours and clear:

The rest is writing, and that is our fate.”







 아래 교육 과정은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와 [두 번째 나] 책을 모두 읽으신 사람을 위해 2025년에 시작될 [두 번째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입니다.


1주 차. 발견과 인정 (Uncover & Accept)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할 때 비로소 나답게 살 수 있듯이, 중장년의 전환기를 인정해야 비로소 성장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나답게 사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이 듦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을 시작하자.


2주 차: 발견과 개발 (Discover & Develop)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직업명으로 그려진 목표였다. 중장년이 되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직업이 아닌 진짜 나의 정체성으로 답할 때가 되었다.


3주 차: 정의와 습관 (Define & Habit)

삶의 중요한 부분은 습관으로 이루어진다. 직업과 역할을 넘어선 정체성을 정의하고, 작은 습관을 통해 진정한 자기다움을 구축하자. 정체성은 반복된 선택과 습관에서 피어난다. 내가 되는 습관을 통해 자기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4주 차: 변화와 일상 (Change & Routine)

하루의 작은 변화가 인생의 혁신을 만든다. 하루를 설계하고 기록할 수 있는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충분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면 단순히 나이 들어갈 뿐이지만, 변화를 통해 내가 될 수 있다.


5주 차: 리셋과 설치 (Reset & Install)

나이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평가하며 진정으로 나다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실천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자.


6주 차: 탄생과 명명 (Birth & Naming)

새로운 시작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때 완성된다. 이제 새로운 정체성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자. 그것이 바로 자기다운 삶이다.


7주 차: 회상과 성찰 (Recollection & Reflection)

과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준비다. 실수와 성공을 회상하며 얻는 교훈은, 현재 나를 성장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8주 차: 기억과 창조 (Memory & Creation)

미래의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도구다. 상상을 통해 떠올린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자.


9주 차: 목적과 유산 (Purpose & Legacy)

나의 유산을 정의할 때,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지금까지 나답게 살아온 삶을 정리하며 나의 인생 황금기를 준비하자.


10주 차: 연결과 공동체 (Connection & Community)

진정한 공동체는 혈연이나 학연이 아닌 같은 목적과 소명을 공유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아진다. 중장년의 삶은 직장인의 정체성을 넘어, 나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부족의 일원이 되어가는 여정이다.








관련 사이트 


https://www.unitaslife.net/



https://www.theunitas.net/



https://www.goodbrandgoodecosyste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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