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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Nov 16. 2024

죽음을 배우며, 인턴으로 산다는 것

나듦의 계절, 인디언 서머(10)

내가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쓰던 중, 여전히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는 지인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스로 은퇴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면, 언제쯤 은퇴하고 싶으신가요?”


그들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노후 자금을 계산해야 한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가정을 하나 제시했다.


 “일단 통장에 100억 원이 있다고 해보죠. 그렇다면 언제 은퇴하고 싶으신가요?”


놀랍게도 대부분의 인터뷰이가 이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 당장.” 그들에게 은퇴란 곧 경제적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나 나는 돈으로 은퇴 시점을 결정하는 이 단순한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다면 은퇴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정해져야 할까? 직장인들에게 은퇴는 흔히 법정 정년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하지만 정년을 맞이했다고 해서 반드시 은퇴해야만 하는 걸까?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정해진 나이에 맞춰 은퇴해야만 하는 사람일까?”


은퇴 예정자와 이미 은퇴한 사람들에게 은퇴의 기준을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은퇴 시점에 하는 일은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꿔 보았다.


 “그렇다면 다시 인턴으로 돌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3개월 동안 수습 기간을 다시 거칠 수 있으신가요?”


대부분의 사람은 멋쩍게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가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기회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이 여전히 의미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이는 단순히 은퇴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깊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영화 [인턴(The Intern)]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벤 휘태커는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한 답을 던진다. 그는 입사 인터뷰에서 사장 줄스(앤 해서웨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음악가에게는 은퇴가 없다고 들었어요. 단지 음악이 사라지면 멈출 뿐이죠. 제 안엔 아직 음악이 남아있어요.”




전화번호부 출판 회사 “덱스 원”의 임원으로 일했던 벤 휘태커는 은퇴의 기준을 단순히 나이로 정하지 않았다. 그의 기준은 음악가처럼 자기 안에서 들리는 ‘음악’이었다. 물론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일과 음악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70세의 벤 휘태커는 여전히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직업의 연장이 아니라, 그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열정과 동기였다.


이 장면은 은퇴라는 개념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은퇴란 과연 태양이 가리키는 시간, 즉 나이에 의해 정해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에서 울리는 어떤 목소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일까? 만약 후자가 맞다면, 나는 내 안의 무엇으로 은퇴 시기를 결정할 수 있을까?


영화 제목이기도 한 “Intern”이라는 단어는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라틴어 “internus”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안쪽의” 또는 “내부의”라는 의미가 있다. 시간이 흐르며 여러 언어로 확장되면서 이 단어는 점차 그 의미를 넓혀갔다. 프랑스어 “interne”에서는 “내부 사람” 또는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특히 병원에서 수련의를 지칭하는 단어로 정착되었다. 이후 영어로 넘어오면서 “intern”은 다양한 분야에서 훈련을 받거나 실습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했다.


결국, “intern”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내부에 속하거나, 내부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직업적 훈련생의 개념을 넘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내부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벤 휘태커가 말한 ‘음악’은 단순한 선율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열정, 동기, 그리고 삶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내면의 소리다. 누구나 각자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 순간이 바로 진정한 은퇴의 순간이 아닐까?


“Intern”의 어원적 의미와 벤의 대사를 떠올려보면, 은퇴란 더 이상 나이나 외부의 기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르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내 안의 음악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그것이 내가 은퇴해야 할 순간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 안의 음악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음악은 여전히 울리고 있나요?”


나는 평생 인턴으로 살고 싶다. 인턴으로 산다는 것은 끝없이 자신 안을 탐구하고,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매일 나 자신을 배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남들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아도 나만 관심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는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휩쓸리기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귀 기울이며 나를 알아간다.


음악가들이 자기 안에서 들리는 음악을 멈추는 순간은 언제일까? 음악을 듣고 싶지 않을 때일까, 아니면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일까? 나는 음악가처럼 실제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소유가 아니다. 어떤 대단한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 기쁨은 고작 며칠, 길어야 일주일 정도 이어질 뿐이다. 내가 진정으로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소유로 채울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마치 입가에서 흥얼거리는 멜로디처럼 항상 내 심장 가까이에 머물며 나를 부르는 무언가다.


이 갈망은 단순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그 시간 동안 내 안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위해서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은퇴하고 싶지 않다. 은퇴란 단지 육체의 정지나 직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배움이 멈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장이 멈추는 순간이 육체적 죽음이듯, 배우려는 마음이 멈추는 순간이 은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낀 것은 내 안의 ‘음악 소리’—즉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점점 더 커지고, 더 빠르게 울린다는 것이다.


그 음악은 단순히 지식을 쌓으려는 욕심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깨닫고,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이다. 내가 늙어가는 것과 내가 진정한 나로 변화해 가는 것의 차이를 나누는 기준은 바로 배움이다. 배움을 멈추는 순간, 노화는 시작된다.


나를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전에 쌓아온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배워왔으며, 소유했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릴 때,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내가 힘들게 연구한 콘텐츠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도 그러한 내려놓기의 일환이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theunitas.net에 공개하며 그것들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배움의 문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나 콘텐츠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보호가 오히려 배움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한다.


보호하려는 마음이 커지면, 배움을 향한 갈망은 점점 작아질 뿐이다. 반대로, 나누는 마음을 가지면 새로운 배움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릴 수 있다.


배우는 마음은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거나 기술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어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나를 내려놓고, 새로운 나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배우는 인턴으로 살고 싶다. 내 안에서 음악이 멈추는 순간까지, 배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 싶다. 내가 흥얼거리는 그 음악은 언제나 내 심장 가까이에 있으니, 나는 오늘도 나를 배우고,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는 요즘 내 몸을 배우고 있다. 운동을 통해 건강한 몸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나이가 들며 자연스레 변해가는 몸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채고 그것에 적응하는 배움의 과정이다.


젊었을 때는 입에 즐거운 음식을 좇았다. 기름지고 달콤한 음식을 먹으며, 맛이 주는 짧은 행복에 만족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내 몸을 지탱하는 심장, 간, 혈관처럼 보이지 않는 기관들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선택한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내 몸 전체를 고려한 선택을 하며 나를 돌본다.


나는 단지 오래 살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 몸을 유지해야 한다. 몸은 곧 내가 꿈꾸는 삶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나는 그 변화를 부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배우고자 한다. 피부의 탄력이 줄어들거나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처럼 작은 변화들도 내 몸이 들려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늙어감은 쇠퇴가 아니라, 더 지혜로워지는 과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몸의 한계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며,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나를 돌본다. 예를 들어 무리한 운동 대신 내 몸에 맞는 유연한 운동을 찾고, 몸이 편안히 작동할 수 있는 음식을 선택한다. 몸을 배운다는 것은 단지 건강을 유지하거나 식단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 나의 내면과 연결된 삶의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다. 나를 위해 먹는 음식 하나, 꾸준히 이어가는 운동 하나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삶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 된다.


늙어가는 것을 배우는 것은 나이 듦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준비된 마음과 건강한 몸은 내가 원하는 일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몸을 배우는 이유다.


몸은 우리의 동반자이자 스승이다. 내가 이루고 싶은 모든 일, 내가 꿈꾸는 모든 가능성은 몸을 통해 실현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몸을 이해하고, 그것과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보이지 않는 내장 기관들이 보내는 미묘한 신호들에 귀를 기울이며, 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죽음을 배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죽음을 배우는 것은 삶의 끝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더 명료하고 선명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지난 50여 년 동안 삶을 배워왔지만,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해도 내 삶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죽음의 시기를 결정하거나 안락사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자기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죽음을 배우면 삶의 모든 것이 단순해지고, 매일의 선택이 분명해진다.


나는 은퇴와 죽음을 음악가의 ‘음악’처럼 생각하고 싶다. 음악가의 음악이 들리지 않을 때 은퇴하고, 삶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죽음을 맞이한다. 누군가 나에게 “언제 죽고 싶으신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지금도 괜찮습니다.”


내가 '감히' 이런 대답을 했다면, 나는 자기답게 살아서 언제든 자기답게 죽을 수 있다는 대답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길 위에서 연결된 과정이다. 죽음을 배우고 준비한다는 것은 곧 내가 원하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싶다.


평생 인턴으로 산다는 것은 끝없이 배우는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늙어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배우기를 멈추는 순간 진정한 노화가 시작된다. 나는 과거의 나를 내려놓고,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며 나를 배워가고 있다.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 안의 음악은 무엇인가? 그 음악은 아직도 울리고 있는가? 오늘 하루만큼은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그것이 은퇴와 죽음을 준비하는 당신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아래 교육 과정은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와 [두 번째 나] 책을 모두 읽으신 사람을 위해 2025년에 시작될 [두 번째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입니다.


1주 차. 발견과 인정 (Uncover & Accept)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할 때 비로소 나답게 살 수 있듯이, 중장년의 전환기를 인정해야 비로소 성장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나답게 사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이 듦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을 시작하자.


2주 차: 발견과 개발 (Discover & Develop)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직업명으로 그려진 목표였다. 중장년이 되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직업이 아닌 진짜 나의 정체성으로 답할 때가 되었다.


3주 차: 정의와 습관 (Define & Habit)

삶의 중요한 부분은 습관으로 이루어진다. 직업과 역할을 넘어선 정체성을 정의하고, 작은 습관을 통해 진정한 자기다움을 구축하자. 정체성은 반복된 선택과 습관에서 피어난다. 내가 되는 습관을 통해 자기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4주 차: 변화와 일상 (Change & Routine)

하루의 작은 변화가 인생의 혁신을 만든다. 하루를 설계하고 기록할 수 있는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충분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면 단순히 나이 들어갈 뿐이지만, 변화를 통해 내가 될 수 있다.


5주 차: 리셋과 설치 (Reset & Install)

나이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평가하며 진정으로 나다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실천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자.


6주 차: 탄생과 명명 (Birth & Naming)

새로운 시작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때 완성된다. 이제 새로운 정체성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자. 그것이 바로 자기다운 삶이다.


7주 차: 회상과 성찰 (Recollection & Reflection)

과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준비다. 실수와 성공을 회상하며 얻는 교훈은, 현재 나를 성장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8주 차: 기억과 창조 (Memory & Creation)

미래의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도구다. 상상을 통해 떠올린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자.


9주 차: 목적과 유산 (Purpose & Legacy)

나의 유산을 정의할 때,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지금까지 나답게 살아온 삶을 정리하며 나의 인생 황금기를 준비하자.


10주 차: 연결과 공동체 (Connection & Community)

진정한 공동체는 혈연이나 학연이 아닌 같은 목적과 소명을 공유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아진다. 중장년의 삶은 직장인의 정체성을 넘어, 나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부족의 일원이 되어가는 여정이다.







관련 사이트 


https://www.unitaslife.net/



https://www.theunitas.net/



https://www.goodbrandgoodecosyste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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