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탄생
기업들은 시장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여전히 미온적이다.
이러한 기업의 태도를 가장 ‘오래된’, 잘 설명한 연구 중 하나는 1960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 7/8월호에 실린 테드 레빗(Ted Levitt)의 소논문이다.
레빗은 ‘마케팅 근시안(Marketing Myopia)’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업들이 제품 개발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외면하는 경향을 지적했다. 그는 기업이 제품 중심이 아닌 고객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하며, 고객 만족을 극대화하는 마케팅 전략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철도 산업이 위기를 겪는 것은 고객의 요구가 다른 운송 수단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철도 자체가 고객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도 경영자들은 ‘운송업’이 아닌 ‘철도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인식하며, 스스로 시장의 범위를 좁게 정의하고 있다. 이들은 고객 지향적(Customer-Oriented) 이기보다 제품 지향적(Product-Oriented) 사고에 머물러 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운송업체들이 고객을 빼앗아 가도록 방치하고 있다.”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이 시장의 판도를 바꾼 지금도 ‘마케팅 근시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기업의 경영자와 마케터들은 단기적 시야에 갇혀 본질적인 변화를 놓치고 있다.
이러한 근시안적 사고는 시장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소비자 중심이 아닌 기업 중심의 전략을 고수하게 만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타벅스가 “우리는 커피 비즈니스가 아니라 피플 비즈니스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제품이 아니라 사용자 경험을 중심으로 브랜드를 구축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마케팅에서 근시안(Shortsightedness) 이 문제라면, 브랜드 경영에서는 난시안(Astigmatism) 이 더 큰 문제다.
난시(Astigmatism)란, 빛이 망막 위의 한 점에서 초점을 맺지 못해 시야가 흐려지는 시력 장애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브랜드 난시안’은 브랜드가 핵심 가치와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잃고 흔들리는 현상을 뜻한다.
이런 브랜드 난시안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소비자 반응에 집착한 나머지, 블로그 후기나 SNS를 과도하게 관리
- 너무 노골적인 사용 후기 유도 및 인위적인 감동 동영상 제작
-‘사회적 가치 실현’이라는 명목하에 형식적인 캠페인을 운영
- 경쟁사의 마케팅 전략을 그대로 모방하여 차별성을 잃는 경우
이러한 난시안적 브랜드 운영 방식은 결국 브랜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소비자의 신뢰를 약화시킨다.
브랜드 차별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지만, 기업 경영의 위기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경쟁자, 모방자, 대체 상품의 등장과 해외 쇼핑몰의 확산으로 인해 브랜드 차별화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
-해외 트렌드의 빠른 유입
-거대 자본을 앞세운 스타 PPL(간접 광고)
-미디어 채널의 폭발적 증가
-강력해진 소셜 네트워크
- 불황 속에서 ‘가성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소비자
이 모든 요소들이 맞물리면서 2000년대의 시장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정작 기업들의 브랜드 전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2000년대 브랜드 보고서와 2025년대 브랜드 보고서를 비교해 보자. 현 시장 상황을 삭제하고 문서만 놓고 본다면, 2000년에 사용된 단어와 2025년도의 단어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놀랍게도 변한 것은 거의 없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기업의 경영자라면, 브랜드 담당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사용자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가?”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은 경영자가 브랜드 담당자에게 할 것이 아니라, 브랜드 담당자가 경영자에게 해야 할 질문이다.
이번에도 오래된 이야기다.
2001년 10월 23일, 애플이 “맥이 아니다”라는 콘셉트로 아이팟(iPod)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당시 MacSlash라는 매체는 이렇게 평가했다.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 399달러짜리 아이팟을 11월 10일에 살 사람은 고작 두 명일 뿐.”
애플이 아이팟을 처음 선보였을 때,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팟은 애플워치까지 이어지는 애플 브랜드의 핵심 계보를 이루고 있다.
차별화된 브랜드는 시장의 반응보다, 자신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데 집중한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누구나 아는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뉴턴에게 이 현상은 단순한 상식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그는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이렇게 질문했다.
“그런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을까?”
이 의문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고, 상식 뒤에 숨어 있던 놀라운 진실을 밝혀냈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브랜드는 단순한 상표나 제품으로 인식되지만, 그 이면에는 소비자와 브랜드를 연결하는 강력한 법칙들이 작용한다. 이제 업계에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브랜드 경영의 핵심 원칙을 살펴보자.
컬트 브랜드 연구가이자 《왜 그들은 할리와 애플에 열광하는가?》의 저자인 더글라스 애트킨(Douglas Atkin)은 브랜드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브랜드는 소비자를 더욱 ‘나답게’ 만드는 코드이다.”
이는 소비자가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강화한다는 의미다.
《열광의 코드 7》의 저자인 패트릭 한론(Patrick Hanlon) 역시 브랜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브랜드는 소비자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다.”
즉, 브랜드는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소비자가 믿고 따르는 가치와 신념의 상징이 된다.
미국 유타대학교 비즈니스 스쿨 교수이자 소비자 행동 연구가인 러셀 벨크(Russel Belk)는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소비자는 브랜드를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인간의 특성을 부여한다. 브랜드는 소비자의 자아 형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소유한 물건을 자신의 일부로 간주한다.”
하버드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수잔 포니어(Susan Fournier)도 이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사람은 물리적인 대상을 의인화하여 관계를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브랜드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소비자가 감정적으로 애착을 가지는 ‘관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이 같은 소비자 심리를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거장,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도 연구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유는 선택과 선호, 그리고 취향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사람은 소유물과 자신을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즉, 소비자는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브랜드는 소비자의 자아를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있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의 저자이자, 과거 브랜드 중독자였던 닐 부어맨(Neil Boorman)은 브랜드와 자아의 관계를 이렇게 증언한다.
“브랜드는 곧 자아의 상징이다. 내가 소유한 물건은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느끼며, 어떠한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반영한다. 소비자들은 브랜드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에 대한 긍지를 확인하며, 점점 더 브랜드에 길들여진다.”
닐 부어맨은 한때 브랜드에 집착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이 브랜드를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자아의 일부’로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브랜드는 더 이상 단순한 ‘상표’나 ‘상품’이 아니다. 브랜드는 소비자 정체성의 일부이며, 자아를 확장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이제 브랜드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우리 브랜드가 무엇을 판매하는가’가 아니라, ‘우리 브랜드가 소비자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브랜드는 단순한 로고나 제품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기업들은 5천 년 전 소의 엉덩이에 불도장을 찍어 소유권을 표시하던 방식처럼 브랜드를 단순한 표식으로 여긴다.
이에 대해 《브랜드 발전소》의 저자이자 스타벅스와 나이키의 브랜드 책임자로 활동했던 스콧 베드버리(Scott Bedbury)는 이렇게 설명한다.
“브랜드란 손에 쥐거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물체가 아니다. 이런 특징은 상품에나 해당된다. 브랜드는 수년간 마음속에 쌓여 만들어지는 ‘살아 있는 개념’이다. 일부는 논리적이지만, 어떤 부분은 철저히 감정적이다. 가장 오래 지속되는 브랜드 이미지 중 일부는 완전히 감성적인 요소에서 비롯된다. 훌륭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 말은 브랜드가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정신적 자산임을 강조한다.
‘훌륭한 브랜드는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브랜드를 제대로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영자나 브랜드 책임자들은 브랜드 구축을 단기적인 매출 상승과 동일시하며, 브랜드의 본질을 외면한다.
결국, 얕은 지식과 조급증이 브랜드를 죽인다.
그렇다면 브랜드는 어떻게 학습해야 할까?
《열광의 코드 7》의 저자 패트릭 한론(Patrick Hanlon)은 브랜드의 핵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브랜드 자체가 아이콘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메시지가 필수적이다. 브랜드 메시지는 기업과 고객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전달되며, 성공적인 브랜드가 되려면 고객의 일상 속에서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이 말에서 우리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곧 사용자의 가치’라는 중요한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브랜드는 단순히 생산자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제품이 아니다. 브랜드는 소비자가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메시지’다.
《4D 브랜딩》의 저자인 토마스 가드(Thomas Gad)는 브랜드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브랜드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형성되며, 강렬한 정신적 흔적을 남긴다.”
즉, 브랜드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 브랜드 경영자들은 더 이상 “우리는 어떤 제품을 팔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우리 브랜드는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남기는가?”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브랜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쓰고 있는 ‘브랜드 가면’을 벗어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상표가 브랜드라는 착각, 현재 브랜드 전략이 최선이라는 확신, 그리고 브랜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는 자만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오히려 브랜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브랜드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제 가면을 벗고 사용자의 관점에서 브랜드를 바라보아야 한다. 브랜드는 생산자가 선언한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용자가 브랜드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비로소 브랜드는 완성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브랜드 경영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익숙했던 브랜드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으면 브랜드는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무지(無知)는 편견을 낳는다.”
이는 브랜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대적인 브랜드 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과거의 낡은 마케팅 법칙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영자와 브랜드 책임자들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행동하지만, 역설적으로 브랜드가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브랜드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브랜드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브랜드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오히려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브랜드계의 구루이며 브랜드 관련 서적을 가장 많이 저술한 데이비드 아커(David A. Aaker)는 한 인터뷰에서 브랜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브랜드는 스피릿(Spirit)이다. 그것은 기업의 영혼이다.”
그동안 브랜드를 철저히 전략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왔던 아커조차도 결국 브랜드를 ‘영혼’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이 말은 다소 낯설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브랜드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기업의 정체성과 가치를 담은 존재라면, 브랜드가 ‘영혼’이라는 표현은 그리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업(Corporation, Company)의 사전적 정의는 ‘영리를 목적으로 재화나 용역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조직체’이다. 하지만 라틴어 어원 Corpus는 ‘몸’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조직이 아닌 ‘영혼을 가진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기업과 브랜드 모두 영적인 영역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브랜드 경영을 단순한 사업 활동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리는 그동안 브랜드를 단순한 거래의 도구, 매출을 창출하는 시스템으로만 여겨왔다. 하지만 브랜드의 가치는 단순히 보이는 것(동전의 앞면)에 있지 않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뒷면까지 들여다보며, 브랜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