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붙잡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
왜 이 책을 읽게 됐냐면...
기묘한 케이지라는 평소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우연히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를 소개해주는 영상을 보게 됐다. 내용이 딱 내가 좋아하는 토론하기 좋은 주제의, 사람마다 여러 의견으로 갈리면서 깊게 생각해볼 계기를 주는 이야기여서 바로 끌리게 되었고, 영화를 보고 나서 책도 바로 사서 읽게 되었다.
실제로 보니 유튜브 소개영상보다 실제 영화가 기대 이상이었고, 영화보다 원작은 또 기대 이상이었다. 작품을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너무 취향이라 맘에 들었지만 주제가 어려운 주제이니 만큼 오랫동안 리뷰를 쓰기가 망설여졌다. 작품은 몇몇 주연 캐릭터들을 통해, 크게 3개의 플롯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한 플롯, 한 플롯마다 할 얘기가 너무 많기도 했고, 섣불리 어떠한 의견을 붙여도 그것 또한 나만의 새로움 올바름(正)이 될까봐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최근에 본 작품들 중에서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 없고, 이렇게까지 맘에 든 작품도 없었어서 어렵더라도 꼭 리뷰를 남기고 싶었다.
일단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LGBTQ+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이지만 청불관람가가 아니었고 성적인 느낌도 전혀 없이 전체적으로 매우 절제된, 딱 일본 영화 같았다. 보통 성소수자를 다룬 미디어는 성적인 부분을 특히 부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클리셰가 없어서 좋았다. 그런데 원작 소설에서는 등교거부 아들을 둔 검사 데라이 히로키의 입장에서 속마음까지 독자가 알 수 있는데, 몇몇 부분이 거북스럽게 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데라이는 겉으로는 누구보다 올바름(正)에 집착하면서도, 뒤로는 모순적으로 카펫 밑으로 더러운 먼지를 쓸어 넣듯 덮어버리는, 안일한 구시대적임의 상징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납득이 가기도 했다.
또 하나는 데라이 히로키가 아빠임에도 불구하고, 아내 유미와 가족끼리 대화할 때 아빠로서의 자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아이 생각은 아내 유미 혼자 하고, 데라이는 오로지 자기 신념과 체면, 남편으로서의 입지만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도 남자에서 아빠로 성장하지 못한 남자와 사는 가족의 짐을 홀로 짊어져야 하는 아내가 불쌍했다. 게다가 자식을 도와주는 봉사단체 선생님에게 경쟁심과 질투까지 느끼는 모습은 너무 못나 보였고, 자식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아내 자기 삶을 위해서라도, 저런 의지 안 되는 남편과 혼자 짐을 다 짊어진 채 미래를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책 후반부에 이혼을 선택하는 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 다음으로 다이야의 플롯을 통해서는, 다양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새로운 시대를 외친 변화 속에서도 정작 ‘진짜 다양성’에 대한 깊은 고민은 빠진 채, 얄팍한 변화가 또 다른 소수자들을 상처 입히고 있다는 점까지 꼬집어 주어 속 시원했다.
그리고 사사키와 키류의 플롯은 개인적으로 이 캐릭터들이 뱉는 대사들마다 너무 가슴에 와닿아서 강렬히 꽂히는 느낌이었다.
"지구에 유학을 와있는 기분이었어."
이 대사는 원작에도 나오지만, 특히 영화판에서 직접 음성으로 들으니 눈물이 났다.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도 세상 어느 곳도 내 집 같다고 느껴지지 않던 긴 시기가 있었는데, 솔직히 지금도 그 기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 내 심정을 마치 이 캐릭터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정말 사사키 말처럼 “너무 내가 할 법한 말”이었다.
이후 두 사람이 서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시작한 결혼생활은 정말 신선했다. 결혼이라기보다는 공범끼리 시작한 동거생활, 혹은 쉐어하우스에 가까웠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면서도 기대기보다는 각자 서 있는 형태, 이 이성적이고 차가운 동거는 오히려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정말 서로의 공간 침범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에서만 볼 수 있을 법한 관계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경찰조서 장면에서의
'사라지지 않을테니까...'
라는 대사는 영화에서 더 잘 살렸다고 느꼈다. 원작에서는 사사키와 키류가 서로에게 전하지만, 영화에서는 키류만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데라이 검사에게 부탁한다. 영화는 충격에 멍해진 데라이의 얼굴로 끝나는데, 나도 그 장면을 봤을 때 데라이와 똑같은 표정이 됐다. 앞선 빌드업 덕분에 그 말의 무게가 한순간에 폭발하듯 묵직하게 꽂혔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절박하게, 자기들을 쫓아내려는 사회에서 발버둥 치며 생존하려는지 알기에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한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후반부 챕터의 간베 아야코와 다이야가 다이야 집 현관 앞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이었는데...
아마 간베 아야코 이야기가 가장 다른 플롯들보다 더 이견이 갈릴 수 있는 플롯이 아닐까 한번 예상해본다. 나도 간베 아야코 파트는 갈수록 조마조마했다.
간베 아야코는 친오빠가 자기 얼굴을 한 여자가 나오는 포르노를 본다는 걸 알게 된 후 남성공포증을 갖게 된다. 책의 묘사만으로는 오빠가 자신과 닮은 배우가 나오는 영상을 일부러 보는 건지, 아니면 AI 딥페이크로 만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남성공포증을 얻지만, 다이야에게만은 다이야가 여자를 성적으로 보지 않는 이성애자가 아니기 때문에 묘한 안심을 느끼고 아슬아슬한 접근을 반복한다. 이 긴장감이 쌓이다가 마지막 현관 앞 대화에서 풀린다.
그 장면은 이성적으로는 불편했지만, 동시에 불편함조차 잊고 싶을 만큼 간베가 끝까지 온마음을 부딪쳐서 인간다운 대화를 하려고 포기하지 않는 그 용기와 고집이 감동적이면서도 뭔가 그리운 느낌을 받았다. 특히 내 머리를 탁 치듯 충격을 준 간베의 말이 있었다. '나를 쓰러뜨릴 수 있는 완력을 가진 사람에게서 받는 원하지 않는 성적 접근과 물리적으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의 관심을 받는 건...
덩치 차이 때문에 다가오는 위협감이 다르다고.'
새삼스럽게 이 부분에서 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처럼 충격을 받았을까 싶었는데, 남자와 여자 모두 평등하고 똑같다는 평등담론이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염색체부터 다르다는 이 자명한 사실이 지워진 세상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항상 알고는 있었지만, 시대 분위기 속에서 자기 아버지 세대만큼의 성차별 권력을 얻을 수 없다고 불안해하는 기존 주류들의 생떼 속에서 굳이 입을 닫고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다시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결말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저자의 의도처럼 새로 바뀌는 시대에 대해 다시 고찰하게 됐다. 특히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결국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드러내는 말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했다. 주제가 무거워서 한 챕터씩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다 읽고 나니 여운은 더 짙었다. 영화 버전에서는 물소리 ASMR이 배경으로 잔잔히 흐르는데, 마치 명상할 때 같은 기분을 주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에도 물소리를 틀며 작품을 곱씹었다. 성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이렇게 평화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이 작품의 묘미였다.
읽고 난 느낌을 굳이 말하자면...
지금 시대를 가장 잘 드러낸 소설 같으면서도, 지금 시대이기에만 나올 수 있었던 소설 같았다. 작품의 주제가 성소수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꼭 성적 지향을 떠나서도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소설로,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여전히 오래 울릴 것 같은 이야기다.
한 줄 평?
"읽는 내내 불편하지만, 그 기억 때문에 더 오래 붙잡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