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시작했다. 어린이 시절 이후 17년만이다. 집의 고명딸이었던 나는 내 또래들이라면 으레 그랬듯, 여러 예체능 학원에 다니며 소양을 쌓았다. 그 중 나의 주종목은 발레였는데, 콩쿨도 나가고 전공 준비를 할 정도였으니 꽤나 치열하게 했더랬다. 그 때는 피아노가 발레할 때 음악적 이해를 높이기 위한 세컨드 종목쯤이었지만 성인이 되고나서는 발레보다는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래저래 여러 일에 치이다 보니 이제서야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을 뿐이다.
발단은 피아노 레슨이었다. 절대 같이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나의 왼손과 오른손이 어쨌든 같이 움직인다는 신기함과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쉬운 버전이나마 연주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생각 이상이었다. 장비병이 도졌다!
‘장비병’은 물론 실재하는 의학적 질병은 아니다. 취미생활을 하면서 활동의 본질보다 관련 장비에 집착하는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박한선.(2018.07).[big story].‘장비병’이라는 ‘행복한’ 마음의 병. 한경머니 제158호
"어차피, 이왕이면"은 윤리적 소비를 위한 말그대로 Magic Word이지만 장비병을 일으키는 또 다른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어차피 사는 거 이왕이면 음색도 내 맘에 들었으면 좋겠고 타건감도 좋았으면 좋겠고 나의 미니멀한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예쁜 피아노였으면 좋겠다."가 되어 어느새 점점 고사양의 피아노로 눈이 가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있다 업라이트 피아노를 들일 계획이라 연습용으로 무리가 없는 수준의 저렴한 디지털 피아노면 그만인데도 말이다.
첫 번째 매치: 스테이지 VS 콘솔
나는 업라이트 피아노는 영창과 야마하밖에 쳐보지 않았다. 영창보다는 야마하의 건반과 음색을 선호해서 야마하 쪽 디지털 피아노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피아노는 야마하의 P-125 모델이었다.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이 보이는 피아노였고 가격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무스탠드, 3개짜리 페달, 피아노 의자를 정품으로 구입하게 될 때 거의 100만원이 되기 때문에 가격적인 메리트가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저렇게 사느니 콘솔형 디지털 피아노를 사는 게 낫다 싶었던 것이다.
고급형 디지털 피아노를 사기에는 업라이트를 들여올 예정이라 YDP 라인이 좋은 선택이 될 듯 했다. 무엇보다 의자, 스탠드, 페달을 따로 사는 게 아니라 한 번에 결제만 하면 집으로 도착할 거라는 게 제일 매력적이었다. 귀찮은 거 제일 싫어한다.
돌발 매치: 롤랜드 FP-30 VS 야마하 YDP-144
YDP-144의 후기를 보다 보니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나를 롤랜드 FP-30으로 데려다 줬다. FP-30은 인터넷 최저가를 기준으로 YDP-144보다 비싸고 YDP-164랑 거의 비슷한 가격대였다. Larry Fine-매분기마다 피아노 구매를 위한 가이드 북을 출판하는 나름 공신력 있는 전문가인 것 같다-의 사이트에서 찾아보니 디지털 피아노 추천 모델에 FP-30은 있고 YDP라인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갑자기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하얀 스테이지 디지털 피아노의 경우 잦은 품절로 인해 정품 나무 스탠드, 의자, 페달을 다 함께 구입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피아노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닌지라 전문가의 책자에 FP-30이 있다는 데 너무 혹한 나머지 옵션을 일일이 사모아야하는 수고를 할까도 싶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다시 YDP라인으로 마음을 돌렸다.
롤랜드는 실제로 쳐본 적이 없어서 열심히 음색 비교 영상으로 소리를 들었는데 다른 건 야마하랑 큰 차이가 없었지만 저음이 광광 울리는 느낌이 좀 무겁고 무서운 느낌이 들어 작별했다. FP-30으로 운명교향곡 치면 진짜 우울할 거 같았다.
두 번째 매치: YDP-144 VS YDP-164
FP-30의 등장으로 최대 100만원만 쓸 거야라고 책정했던 예산이 어느새 그래 120만원까지는 괜찮지 않을까로 바뀌어버렸다.
YDP-144는 P-125와 건반이 동일한 모델이라 가격에 비해 건반이 아쉽다는 평이 있어서 상위 버전인 YDP-164를 넘보고 있다.
돌발 매치: 야마하 YDP-164 VS 뮤디스 MF-300L
자꾸 피아노 커뮤니티에 들어가 정보를 찾다보니 뮤디스라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다. 음색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가격대는 야마하의 절반이다. 화이트는 대부분 품절이어서 조금 더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뮤디스도 매력적인 선택지이다.
아, 참고로 저 가격대들은 모두 하얀 피아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검정색의 경우 그보다 더 저렴한 곳들을 종종 찾을 수 있다. 아무래도 하얀 색이 인기가 많아서 그런 건지 품절도 잦고 가격대 다운도 잘 안 되는 것 같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아니, 내 욕심만 끝이 없나.
어차피 사는 거 이왕이면 똘똘하고 좋은 거 사서 만족스럽게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장비를 살 땐 집착하면서 정보를 찾고, 사고 나서는 장비에 대한 집착은 접어두고 신나게 사용하면 그만이다.
무소유의 가치를 역설하신 법정스님은 물건을 사놓고 애지중지 하느라 물건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소유의 불행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놓고 물건이 상할까 노심초사하는 고통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소유하지 않으면 이러한 번뇌도 없겠지만 모두가 스님과 같이 무소유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이 소비를 하지 않으면 경제가 위축되고 그 화살은 다시 우리를 향하게 되니 어쨌든 우리는 소비의 미덕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스님이 말씀하신 소유의 불행을 알기에 오늘도 열심히 사려는 물건들을 비교한다. 물건을 모셔야 할 정도로 비싸지 않으며 사놓고 맘에 들지 않아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피아노 모델들을 서칭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무엇을 살지 고민하고 알아보는 것은 행복한 고통이니 열심히 고통받아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