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밤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다.

by a universal seoulite

Scene #1


"감사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든 그것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사업자등록증이었다.


그동안 내가 퇴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노래처럼 말하곤 했었다. 퇴사하는 날 나는 곧바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으러 갈 것이라고. 사업을 바로 시작하던 안 하던 상관없다고 했다. 더 이상 회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인증하듯 사업자등록증부터 발급받겠노라고 다짐했었다.


내가 이 생각을 처음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 함께 일했던 인턴의 말을 듣고서였다. 그 친구는 훗날 사업을 하는 것이 오랜 소망이라면서 사업을 시작하진 않았지만 사업자등록증을 만들어서 지니고 있다고 했다. 약간의 세금이 발생하긴 했지만 사업자등록증을 보면서 언젠가는 사업을 하겠다는 마음을 다짐을 되새기곤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멋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상상으로만 그렸던 사업자등록증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제 누구의 지시도 아닌 내가 꾸려가는 인생을 제대로 시작해 볼 참이다. 나는 이제 대표다, 대표! 내 인생의 대표!!!


"야호~~~~~~야호, 야호, 야호!!!!!!"


Scene #2


"Bon Jorno, Uno Espresso"


아침에 눈뜨자마자 슬리퍼를 끌고 집 앞 카페에 왔다.


카페 주인 아르노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내가 야외 테이블에 앉으면 반갑게 다가와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동네 소소한 일들을 속사포같이 쏟아낸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희한하게도 이탈리아 햇빛은 뭔가 다른지 확연히 보통의 구릿빛과 다른 이탈리아산 구릿빛이다)의 아르노는 이탈리안 사람 치고도 유독 말이 빠르고 손동작이 정말로 많다. 정말로! 처음에는 알아듣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이탈리안 특유의 악센트로 쏟아내는 그의 영어가 이제는 정겨울 지경이다.


동네 성당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이 종소리를 들을 때면 내가 정말 이탈리아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 종소리의 아다지오 같은 느긋한 템포가 너무나 좋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바삐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내 일상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아르노가 황금빛 크레마가 도는 에스프레소 잔을 가져온다. 대충 내리는 것 같지만 어느 하루도 감탄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늘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내어준다. 이탈리아 인들에게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마법의 커피 가루 비법이 분명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작고 허름한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지금 내 기분은 너무 행복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고 아름답다.


'어쩜 이렇게 햇빛조차도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타닥탁탁탁, 타타타탁닥닥...)


매일 퇴근 후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다. 어떤 날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수익이 예상을 뛰어넘어서 비명을 지르는 나를 상상하다가 또 어떤 날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로 커피와 와인 투어를 하고 있는 나를 그려본다. 때로는 제법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서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오는 인세를 들여다보며 흐뭇해하는 내 모습을 꿈꿔보기도 하고 건물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쾅 찍는 날도 그려본다.


가끔은 재무전문가 되어 잔고를 확인하고 향후 예상 수입을 계산해보며 절망하고 우울해하는 극현실적 인물이 되어보기도 한다. 혹은 쳐내도 쳐내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회사 업무로부터 죽어라 도망가는데 또 죽어라 일더미가 쫓아오는 비운의 주인공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가슴에 품고 있던 사표를 부적처럼 들이밀면 턱밑까지 따라왔던 일들이 조용히 물러나는 상상을 하며 시나리오를 덮는다.


매일 다양한 시나리오를 쓰지만 결국에는 더 이상 시나리오를 쓸 수가 없다. 나는 먼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현실적인 시나리오부터 써야 한다. 오늘도 '한량이 꿈인 자의 재테크 전략' 시나리오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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