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이정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니 마음이 즐겁다

by a universal seoulite

'올해는 남도기행을 해보자'라는 그냥 그 단순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남도여행이었다. 늘 그러하듯 아무런 계획 없이 숙소조차 예약하지 않고 우리는 여행길에 올랐다. 남으로 남으로 생전 처음 달리는 고속도로를 따라 목포, 여수를 찍고 진도, 신안까지 우리의 발길이 닿을지는 여행 시작 때는 몰랐던 일이었다.


우리가 예정에도 없던 진도와 신안을 가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오로지 김환기 선생의 고택과 힐링 장소로 유명하다는 운방산림을 보고 싶다는 것이 우리가 진도와 신안 골짜기까지 흘러들어 간 이유였다. 그때가 아니면 다시 남도 끝자락까지 찾아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환기 선생의 고택을 찾아 들어간 신안에서 우리는 선생의 그림에서 보았던 잔잔하게 일렁이는 쪽빛 푸른 바다를 보았고 길을 잃어 헤매었던 신안의 어느 바닷가에서는 여태껏 보았던 중 제일 예쁜 노을을 보고 신안의 아름다움에 제대로 홀리고 말았다. 나는 그 이후로 김환기 선생의 그림에 한층 더 가깝게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정말이다. 신안 바다를 알기 전과 알고 난 이후 김환기 선생의 그림은 내게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되었다.


김환기 선생의 고택을 찾기 전 우리가 운방산림과 소치 허련, 들어본 적 없었던 낯선 단어들에 홀린 듯 이끌려 진도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소치 허련 선생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아끼던 제자였고 허련 선생의 자손들은 우리나라 화가로서는 드물게 3대에 걸쳐 화가의 대를 이어오고 있다. 솔직히 수묵화나 붓글씨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내가 소치 허련 선생의 작품 전시관을 둘러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허련 선생의 일대기와 전시된 작품을 보니 그림뿐 아니라 글에도 조예가 깊어 선생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아끼던 제자였고 한때는 헌종에게 인정받아 명성을 날리기도 했던 선생께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한낱 꿈같았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림과 글들이 중간중간에 보였는데 그것들이 내 마음에 들어와 콕 박혀버렸다.


허련 선생은 다양한 모양의 낙관을 쓰신 것 같은데 그 하나하나의 뜻풀이를 소개하는 영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참으로 재미있었다. 낙관의 디자인이 지금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디자인적으로도 너무 멋지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뜻풀이는 마치 먼저 살다 간 인생 선배가 내게 던지는 숙제이자 깨달음 같아서 한참을 서서 들여다봤다.


그중 겨우 하나 사진으로 건져온 낙관이 내 휴대폰 속에 저장이 되어 있었다.


'일소(一笑)'


웃자! 2023년 올 한 해는 웃자! 소풍 가는 날 같은 기분으로 매일 아침에 눈뜰 수 있기를.



* 소치 허련 선생께서 쓰신 '도서이정(圖書怡情)'

높은 관직과 명성도 한낱 꿈같이 덧없음을 깨달은 선생께서 노년에 쓰신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귀를 빌어 브런치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가 글을 쓰며 마음이 즐겁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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