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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pr 23.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04.

대학원 면접과 연두색 넥타이 그리고 빡치면native

대학원 면접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덤벙대다가 넥타이를 챙겨 오지 못해서 친구의 넥타이를 챙겨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만, 가서 보니 그 넥타이는 연두색과 와인색의 줄무늬, 아주 괴랄한 종류의 색깔이더군요. 그래도 교수님들 앞에서 면접을 보는 상황이므로, 넥타이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했습니다만, 넥타이가 오히려 그의 자신감을 감소시키는 것만 같았습니다. 


면접 대기실에 앉아서, 넥타이를 매다가, 후배 하나가 인사를 해서 쳐다보니, 후배는 슬리퍼에 츄리닝을 신고 면접을 보러 왔더군요. 순간 "이 새끼는 뭐지..."싶었지만, 가끔 그렇습니다. 학부생들이 이 학교의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하는 경우에는 종종 그렇게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는 경우들이 있죠. 물론 면접 들어가면 잔소리는 들을 것이고, 답변도 잘 못하면 더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되겠죠. 하지만 그 후배는 이후 대학원에 문제없이 합격했습니다. 1지망 연구실은 아니었지만요.


그는 면접 대기실에서 1지망부터 5지망까지의 연구실을 작성하는 중에,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1지망 연구실의 교수님께서 올해는 아무도 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금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물론, 그 교수님께서는 그 해에 안식년이셨고 따라서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결과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면 조금 더 충격을 받게 되니까요. 그래도, 그는 1지망을 변경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러함에도 쓴다면 어쩌면 붙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신에, A교수가 많은 학생들을 뽑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A교수의 연구실로 많이 지망해주세요"라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죠. 그는 딱히 A교수를 인격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학부 시절에 그가 가르쳤던 수업 분야인 '정보시스템'이 그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었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교수는 수업을 지독하게 못했고 인격적으로 매우 좋지 못했다는 것이 걸림돌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시점에서 이미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결심을 한 상황이므로 A교수의 연구실을 2지망으로 작성해서 제출합니다. 이 시점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희망은 '그래도 A교수의 연구실에 자대생(대학원과 같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많으니까, 생각보다 괜찮은 연구실인 것이 아닐까? 정도였죠'라는 것이었죠.


시간은 금방 흐르고, 면접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마다 방식이 약간식 다를 수는 있지만 면접은 대부분 '기술면접'과 '인성 면접'으로 구분되죠. 우선, 기술 면접의 경우 교수 3명 혹은 그 이상이 들어와서 통계, 프로그래밍, 최적화 분야 등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봅니다. 또한, 그 외로도 이 학생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쓸만한 사고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학생별로 어느 정도 비슷한 질문을 하겠지만, 학생의 성향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혹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매우 정량화해서 평가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만, 사람이 다르고, 각자 지망하는 연구 분야가 다르므로 이걸 일률적으로 제어하기는 어려워요. 또한, 누군가는 그렇게 변경했을 때의 문제점이 더 커진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 논의는 이후에 다른 글에서 좀 더 자세하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사를 졸업한 현재의 시점에서, 냉정히 돌이켜 보았을 때, 만약 그가 면접관으로 들어갔다면 그는 그를 뽑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꽤 많이 긴장했고 당황해서 면접을 잘 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어본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게 대답했지만, 글쎄요, 약간은 동문서답과 같은 답변을 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나는 질문은 다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질문 1) "대학원 면접을 준비하면서, 과거에 미흡했지만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학부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베이지안 추론(Bayesian Inference)이었죠. 지금도 자주 쓰지는 않아서, 종종 헷갈립니다만, 대학원 면접을 준비하면서 이 부분을 다시 공부했는데 학부 때는 느끼지 못했던 "유레카!"의 순간이 다가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공부하면서 베이지안 추론을 명확하게 이해한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다시 설명하려고 보니까 머릿속이 꼬여서,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 기억은 여전히 그에게 유효해서, 이후 그는 "이해한 것 같아"라고 말하는 그를 늘 의심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이후 늘 "정확하게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자신을 몰아세웠고, 그 덕분에 어떤 지식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려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죠. 이렇게 돌이켜보니, 아쉬운 기억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도움이 되는 기억이 되었네요.


질문 2) "본인을 설명할 때, 본인이 매우 창의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면접을 볼 때 통상적으로 하는 질문인 "자기 자신을 소개해보세요"라는 질문의 후속 질문으로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질문에서 그는 말문이 막혀 버렸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창의적이고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창의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설득력이 없죠.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진실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면접 공간에서,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말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죠.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 정도가 그가 가지고 있는 한계, 벽이었죠. 이 또한, 그의 이후의 삶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나를 증명할 것인가"라는 화두로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기술 면접을 끝내고, 면접실을 나와 마지막 인성면접을 기다리면서 그는 그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어쩌면 모래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다른 하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먼저 "난 틀렸어"라고 생각하고 마음은 접은 것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결국은 남은 것은 '대학원'뿐이었지만 막상 면접을 보고 나오니, 그 마저 내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대학원은 내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 이라고 함부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대학원이 나를 선택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죠. 그리고, 약간은 억울하다, 라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너희가 지금 평가한 것처럼 모자라지 않아. 너희가 이미 뽑은 나의 동기들은 늘 쉬운 수업만 골라 듣는 동안 나는 어려운 수업을 들어가면서 고생을 했는데!!"와 같이 좀 찌질하고 억울한 마음들이 스믈스믈 올라왔죠.


이제 인성면접만이 남았습니다. 인성 면접은 보통 대학원 주임 교수를 만나 일대일로 진행됩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그의 경우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의 글로벌화'는 매우 중요한 이슈니까요 호호. 


기술 면접 때와 마찬가지로, 주임 교수는 그에게 툭, 마치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떨어뜨리듯이 가볍게 "학점이 안 좋네"라는 말을 던졌습니다. 이미 마음이 다쳐 있던 그는 좀 빡쳤고 "제가 다른 학과의 어려운 수업들을 들으면서 학점을 좀 갈아먹었습니다"라고 대답했죠. 다시, 교수는 "타과 과목을 많이 들었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평점이 낮아질 바에야 그냥 평점 관리나 하지 그랬어?"라는 말을 다시 던졌습니다. 이미 기술 면접 때 탈탈탈 털렸던 그는 이 질문을 듣고는 아주 억울함이 폭포처럼 떨어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빡치면 영어가 정말 술술 나옵니다. 


그는, 'X발 불합격 줘라 그냥'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학부 시절 동안 사람은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평점이 좋지 못하더라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고 배운 것이 많다. 비록 평점이 안 좋다고 해도, 내 실력이 다른 아이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 그 노력이 지금의 평점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라고 쏘아붙이듯 영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말을 다 하고 나서야, 너무 쏘아붙이듯이 말했나 싶어서 당황하기도 했고, 생각보다 영어가 술술 나와서 놀라기도 했습니다만, 솔직히 좀 후련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때 교수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더군요. 오히려, '이 아이 좀 당돌하군'정도의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것 같았죠. 그 이후의 대화는 많지 않았고 그저 저에게 "영어 잘하네!"라는 말을 유쾌하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인성 면접이 생각보다 잘 끝났다는 이야기였죠. 그 교수는 나름대로 저에게 압박을 걸었던 겁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했고 결과적으로 그게 좋은 이미지로 보였던 것이죠.


그렇게 면접은 끝났습니다. 같이 면접을 본 다른 후배들과 혹은 다른 친구들과 밥을 먹었던 것도 같고, 밤에는 술을 먹었던 것도 같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그는 기다리면 되니까요. 어떻게든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에 맞춰서 그때 생각하면 되니까, 일단은 생각을 좀 멈추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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