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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May 24.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13

지도 교수의 유형 3편: 게으르게 못하는 교수.

대학원에서 만날 수 있는 지도 교수의 유형을 '열심히'와 '잘'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총 4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당연히, 지도 교수는 "연구실 운영 방식", "연구 지도 방식", "지도 교수의 인성" 등의 매우 세부적인 기준들을 사용하여 분류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만, 저는 "열심히"와 "잘"이라는 두 가지 기준만으로도 매우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열심히"와 "잘"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열심히"는 "야망 있는"이라는 말과 유사할 것 같아요. "성공하려는 욕구가 넘치는 경우"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아요. 보통 막 학교에 부임한 젊은 교수님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며, 동시에, 이 분류에 속한 분들은 "성공을 위해 대학원생을 믹서기에 갈아 넣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해석해도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젊고 열심히 하지만, 인성마저 좋은 교수님들도 있습니다만, 여러분이 대학원에 입학해서 만나게 될 지도 교수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반대로, "열심히 하지 않는"의 경우 정년 보장(Tenure)을 이미 받은 노교수님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죠. 이미 꽤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니까 미련이 없는 분들이 많은 거죠. 물론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만. 


두 번째로, "잘"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연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느냐"를 의미합니다. 

현재의 연구 흐름을 읽고 기존 연구의 한계점을 분석하여, 연구실 혹은 대학원생의 연구가 나아가야 하는 향후 연구 방향을 설정하는 것, 그리고 대학원생의 질문 들에 대해서, 얼마나 좋은 지도 코멘트를 해줄 수 있는가? 와 같은 것들이 지도 교수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성질의 것이죠. 당연하지만, 이 부분이 부족하면 연구실의 방향은 물론 대학원생의 졸업에도 큰 위기들이 닥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고요. 

젊은 교수님들의 경우 대부분 이 부분이 갖춰져 있고, 나이 든 교수님들의 경우도 어떤 통찰력을 갖추고 계신 분들이 있어서 중요한 순간에 머리를 댕-하고 때리는 코멘트를 주시기도 하죠.


세 번째 유형: 게으르고, 못하는 교수.


보통 자신이 전공한 연구 분야가 더 이상 학계의 대세가 아니게 되면서 밀려난 나이 든 교수들이 여기에 속하죠. 좋게 말하면 운이 없는 경우고, 나쁘게 말하면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는 감지하기 어려우니까요. 외부에서 보기에 '연구'가 유행을 타지 않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유행에 매우 민감합니다. 정확히는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이전의 모든 기술의 유용성을 삭제해버리곤 해서, 남이 한 발 앞서 가버리면, 다른 기술들과 연구들이 사양되는 경우들이 많죠. 슬프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연구자의 길로 들어온 이상 공부를 중단할 수 없습니다. 언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에 치열하게 스스로를 갈아 넣어야죠. 다만, 만약 교수가 젊다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거나 할 텐데, 교수가 나이가 들었고 정년보장도 받은 상황이라면, 그냥 삽니다. 등산 다니고 골프 다니고 하면서 그냥 삽니다. 수업도 대충 하고 시험도 대충 비슷비슷하게 내면서 삽니다. 흔히 말하는 '꿀 빠는 직업'에 교수가 속하는 이유죠. 


이 상황이 대학원생에게 최악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은근히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교수는 실력이 없고 욕심도 없기 때문에 대학원생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큰 관심이 없거든요. 그리고 이 연구실에 입학하는 대학원생 또한 그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입니다. "와 이 교수 실력이 형편없구나"라는 것을. 다만, 오히려 이는 대학원생에게 강한 자극이 됩니다.


박사가 된다는 것은 결국 '혼자서 어떤 연구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그 연구를 위해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서 실행하고, 검증하고, 이 연구의 한계점과 후속 연구까지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하죠. 원래 '박사'가 된다는 것은 지독하게 외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지도 교수의 관심이 적고 실력마저 없다면, 이를 입학하자마자 알아차립니다. "졸업하려면 혼자 진짜 열심히 해야 되는구나"라는 사실을요. 


다만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니까요. 지도 교수가 게으르고 또 못하기 때문에 모든 연구를 대학원생이 혼자 다 해내야 하는데, 처음엔 어렵지만 저년 차부터 이 일을 꾸준하게 해 나가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연구 능력이 빠르게 키워지죠. 즉, "지도교수의 무능력"은 대학원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실제로 오히려 이렇게 지도교수가 완전히 방관한 연구실에서 대학원생들끼리 자생하면서 으쌰 으쌰 하던 끝에 연구실 자체에 포텐셜이 터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실은 대학원생이 연구 주제도 스스로 찾기 때문에, 본인이 제일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연구 주제를 찾게 됩니다. 본인이 원하는 연구 주제로 졸업하는 것, 그거 생각보다 흔치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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