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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Mar 14. 2022

슬픈 플레이리스트

유명을 달리한 그들


나만의 황금비: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재즈 50%, 아이와 놀면서 목청껏 따라 부를 만화 주제가 30%, 바벨을 짊어진 등짝을 힘껏 때리는 가요 20%.


  사방이 아직 깜깜하다. 운동을 해야겠다. 몸을 풀기 전에 잠부터 깨고 싶어 음악 어플을 켠다. 플레이리스트 탭을 누른다. 전설적인 밴드와 가수들이  황금비에 따라 가지런히 늘어선 모양새를 살핀다. 오늘은 어떤 걸 고를까.


  04-08이란 띠지를 두른 리스트를 꺼냈다. 운동할 때 듣는 노래는 비트가 빠르고 곡조가 신나야 제격이다. 몸이 혹사 당하는 동안 정신이나마 신명을 찾고 싶은 심리다. 해외 팝이나 힙합도 있지만 귀에 착착 감겨오는 정도로는 아이돌 노래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리스트를 구성하는  2세대 아이돌 노래뿐이다. 2세대 아이돌이라 함은 2004년 동방신기로부터 시작해 2008년까지 데뷔한 이들을 폭넓게 칭하는 말이다. 내겐 10대에서 20대로 이어지는 무렵이었다. 시기가 시기여서일까. 어떤 아이돌 노래도 감성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으며 나와 나의 세대를 대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대를 통과한다는 느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애를 통틀어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었다.



  히트곡으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는 제목부터 마음을 들뜨게 한다. 오늘의 운동을 빼먹지 말고 새로 도전하는 무게에 움츠러들지 말라고 응원해준다. 목청을 한껏 올리는 구간에서는 고통마저 수월히 견딜 수 있다. 트랙이 끝나기 전에 운동을 마치게 될 때는, 마저 듣고싶은 생각에 예정에 없던 횟수나 세트를 하나씩 덤으로 수행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끝 곡까지 들뜸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사와 가락과 장단이 완벽하게 밝고 희망찬데도 기운을 쏙 빼놓는 곡들이 있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노래다. 일단 그것이 한번 재생되기 시작하면 아주 잠깐일지라도 망연함에 사로잡힌다.


  베르테르로부터 햄릿, 나오코, 이명준, 동혁에 이르기까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주인공들을 숱하게 만났어도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나였다. 실존했던 배우와 가수라 해도 마찬가지여서, 2000년대 초까지 활동했던 인물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들려도 그리 오래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유독 04~08년에 데뷔했던 이들에게만 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이 참 어렵다.

 트랙과 함께 앨범 표지가 순식간에 바뀌고, 전자음향으로 가득한 전주가 흐른다. 여전히 맑은 당신과 그때보다 한참이나 탁해진 내가 마주 응시한다. 내려앉는 마음을 감추고 마땅한 생각고르느라 한참 시간이 흐른다.


  오랫동안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추모하는 마음을 갖곤 했다. 생전에 앨범 한 장 사본 일이 없고 당신을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먼발치에 서 있었다. 당신의 몸과 마음으로도 모자라 죽음까지 새까만 말로 뒤덮는 이들의 사이에 끼기 었다. 울음바다였던 행렬이 다 지나가고도 몇 주기가 지나서야 애도 비슷한 마음이 되어 여기 서 있다.


  무엇이 급하여 그리 빨리 져버렸나. 무대가 끝나고 난 뒤의 고독함 때문이었나. 밤낮으로 찔러대는 가시 돋친 말과 속옷까지 다 까발려놓을 기세로 멈추지 않는 관음증 때문이었나. 인생에서 빛나지 않는 순간을 못 견뎌 가장 빛날 때를 골라 돌아간 것인가. 이만하면 잘 살았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어 떠났는가.


  당신은 여유라고는 없던 생을 끝내고 완전한 휴가를 떠나려 했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당신을 사랑한 사람들과 마땅히 치렀어야 할 석별의 절차를 멋대로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커튼콜이나 무대인사도 없이 장막 뒤로 사라져버린 당신을 여전히 연호하고 있다.


  어처구니없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네모난 세상에서 당신은 살아 있다. 손가락을 놀리면 손바닥 위 점들의 집합으로 불려나오는 당신. 무한히 연결된 회랑에서 가장 찬란한 빛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당신. 춤을 춰도 노래를 해도 피곤한 기색 없이 언제라도 스위치로 켜고 끌 수 있다.


  불멸하는 당신이 애처롭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억의 저편으로 놔주어야 할까? 묘비에 싱싱한 꽃다발을 매일 가져다놓는 심정으로 언제까지라도 노래가 멈추지 않게 해야 할까? 당신이 원하는 바가 있어 내게 알려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다. 대답이 기호로 개념으로 여기 닿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팔자에 유명인이 없는 우리는 단 하루도 당신의 하루를 살아보지 못해 어떤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생명에다 기름을 잔뜩 먹이고는 활활 태워 재가 되어가는 등불의 심정을 떠올린다. 주위를 찬란히  밝히고도 정작 자신은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의 심정을 짐작하고는 몸서리친다.


  등을 보이며 떠나간 뒤에도 여전히 당신을 동경하고 뒤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아를 박탈 당하고 생명 자체를 태우더라도 찬란히 빛나기를 바라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들이 질기게 살아남은 후일담을 듣고 싶다. 스타병에 걸려 안하무인이든, 전성기를 만나지 못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서든,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자들의 값싼 입방아에 오르내리든 괜찮다.

  

  존재만으로도 이 세상의 즐거움과 위안이 되었던 꽃들이 제 손으로 줄기를 끊고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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