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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Apr 15. 2022

4월은 옷 입기 좋은 달

코튼 수트 구입기

사진: instagram.com/andreaseoul_official



  4월이다. 지난 겨울은 춥지 않았고 감염 우려로 외출을 삼가느라 코트를 입는 드물었는데, 그나마도 갖고 있던 걸 한두 번 돌려입다보니 그만 날이 풀렸다.


  예전에는 코트 욕심이 많았다. 겨울이 오기 전부터 눈독을 들여놨다가 보통 한 점씩, 어떤 해에는 두 점씩을 들여놔서 옷장에서 코트의 지분이 꽤 컸었다. 그만큼 코트가 좋았다. 어깨에서부터 무릎까지 직선으로 뚝 떨어지는 코트를 잘 고른다면 실루엣에 남성적인 느낌을 더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단정하지만 가까이에서 옷감을 점검할 때 느껴지는 캐시미어의 촉감은 또 어떤가. 캐시미어의 별명처럼, 섬유로 된 보석을 만지는 느낌이다. 패딩에 비해 바람을 잘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심미감이 실용성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캐시미어로 유명한 로로피아나나 콜롬보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코트 자락을 엄지와 검지로 만져봤을 때의 황홀함을 기억한다.


  하지만 춥지 않은 겨울은 패딩뿐만 아니라 코트조차도 거추장스럽게 만든다. 제일 큰 거추장스러움은 차에 타거나 사무실 의자에서 입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인데, 긴 기장의 코트가 땅에 질질 끌리는 것이나 엉덩이로 코트를 깔고 앉아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기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사무실에 도착한 즉시 두툼한 옷걸이에 코트를 걸어 한켠에 상전처럼 모셔둬야 마음이 편하다.


  10여 년만에 코트를 하나도 사지 않고 겨울을 난 통장에는 코트만한 크기의 용돈이 남아있었다. 날씨가 완연한 봄으로 접어듦에 따라 옷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겨울옷 하나는 봄 옷가지 두세 점의 가격과 맞먹으므로 여러 가지를 한번에 갖추고 싶어진다.


  백화점 쇼핑몰, 각종 의류 브랜드의 인스타 계정, 클래식 복식을 취급하는 편집숍 사이트를 매일 순회하면서 S/S 룩북을 마르고 닳도록 찾아본다. 바깥 세상은 미니멀리즘과 여유로운 핏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항공점퍼, 후드티셔츠, 와이드 팬츠, 조거팬츠, 볼캡... 몇 년 째 바뀌지 않는 경향이 다소 식상하다.


  대신 시즌의 색감은 봄날의 꽃처럼 화사하구나. 계절감을 살려주는 스카이블루, 로열블루, 베이지, 엷은 올리브, 분홍색으로 물든 옷가지에 눈이 한번씩 더 간다. 품목을 고르는 동안 3월이 다 가고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옷장에 추가하고 싶은 것들이 정해진다. 진한 베이지 색의 면 재킷, 재킷과 같은 소재와 색상으로 된 팬츠, 그 위에 걸칠 어두운 색상의 점퍼 각 1점씩이다. 이제 그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1. 남성 의류 브랜드의 리스트를 30개쯤 뽑아서 내가 원하는 품목들이 있는지 하나씩 검토한다.
2. IT54(110) 사이즈가 있는지 살핀다.
3. 어두운 베이지와 면 소재로 된 것들만 골라낸다.
4. 옷 패턴이 내 몸에 잘 맞으면서 기존의 워드로브와 호환이 가능한 하나를 최종 선택한다.


  이런 작업들이 귀찮기 짝이 없기는커녕 콧노래가 나온다. 돈 쓸 궁리는 다 즐겁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옷에 쓸 궁리가 가장 보람되다. 몇 날 동안 선택하는 작업을 마치니 4월의 첫 날이었다. 더 늦어져서는 여름옷으로 넘어가니, 서둘러서 돈을 써야지. 지난 겨울서울까지 기차를 타고가서 재킷과 바지를 샀던 편집숍에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인스타에서 보고 전화드립니다. 베이지색 코튼 수트를 구입하고 싶어서요. 네. 몇 가지 좀 여쭤볼게요. 어깨랑 가슴 실측이 어떻게 되나요? 잠그는 버튼이 세 개 맞나요? 물세탁이 가능한가요? 밑단을 4.5cm로 접어올리는 게 좋을까요 5cm가 좋을까요? 폴리우레탄이 섞였나요? 바지에 벨트 고리가 있나요? 턱이 몇 갠가요? 드레스셔츠나 옥스퍼드 구두와 잘 어울릴까요? 실크타이는 어쩌구저쩌구......

  

  전화통 너머의 매니저를 붙잡고 질문을 한참이나 쏟아낸 끝에 사도 될까, 하는 마음이 사야겠다, 라는 확신으로 바뀐다. 옷을 살 때 항상 듣는 레퍼토리를 꺼낸 그는 내 사이즈가 딱 하나 남았다 한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마음으로 결제를 끝내고 수선집에 전화를 걸어 예약까지 마쳤다. 이제 선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집에서 몇 날 며칠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마음이 쓰이는 게 있다면 한 가지, 짧디짧은 봄에 몇 번이나 입을 수 있을까. 여긴 서울에 비해 한참 여름이 빠른 남쪽이고, 나는 땀이 가뜩이나 많은 체질이고,  옷은 제법 두께가 있고. 길게 잡아도 5월 중순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수트케이스에 싸여 옷장 안으로 한번 들어가면 거의 반 년을 묵혀야 한다. 봄만큼이나 옷 입기에 좋지만, 봄만큼이나 짧게 지나갈 가을을 다시 기약해야 한다.


  어찌됐든 봄에 10번은 입고 싶다. 1주일에 1번씩은 직장에 입고 나가야지. 주말에 딸아이와 꽃구경하러 갈 때 한번, 가을까지 입을 바버 점퍼를 사러 백화점 나들이 갈 때 또 한번, 5월 초예정된 가족 모임에 . 그래, 보고싶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에도 차려 입어야지.




 

수선까지 마친 어두운 베이지색 코튼수트. 나머지 코디는 버튼다운 옥스퍼드 셔츠-갈색 서스펜더-더블 몽크 구두.


쌀쌀한 아침에 수트 위에 걸칠 왁스 재킷. 출처: instagram.com/barb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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