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나는 여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계절을 입 밖으로 꺼내보는 일이 그 자체로 방학과 휴가, 여행과 낭만처럼 느껴지는 적도 있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주어지면 어릴 적부터 방구석에 틀어박히곤 했는데,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책과 TV와 컴퓨터 앞에서 보냈다고 해서 여름의 낭만을 모르지 않았다. 열린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 매미 소리와 습도 높은 공기를 하루 종일 내뿜는 선풍기, 냉장고에 차게 보관한 보리차며 달기가 지금만은 못한 수박의 붉은 속살, 눈을 질끈 감고 머리부터 뒤집어쓰는 찬물의 감촉 같은 것들은 계절의 참맛을 알기에 충분했다.
바깥에 나가는 일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던 게, 배트맨 로고가 그려진 반팔 티셔츠와 고무줄 반바지에 슬리퍼면 다였기 때문이다. 여느 계절들처럼 옷의 두께며 색상이나 상의 하의의 조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고 어떤 어른도 옷차림의 칠칠치 못함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았다. 배트맨 티셔츠와 함께라면 학원, 친구네 집, 슈퍼마켓, 오락실이며 분식집과 비디오테이프 가게, 책 대여점... 못 갈 곳이라고는 없었다.
간간히 열대야로 잠 못 드는 밤도 있었지만, 화장실로 가서 찬물을 뒤집어쓰든 선풍기를 끌어안든 밤바람을 쐬러 강변으로 나가서 모기에 잔뜩 뜯겨 돌아오든 새벽은 오게 마련이었다. 한때는 그런 날들마저 좋은 추억이 되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독해지는 더위 때문에 이젠 여름이 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이 며칠간 이어졌다. 직장에 나서기 전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짧은 순간에도 나는 예견한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바깥에서 도사리던 열기가 단숨에 밀고 들어와 건조해 둔 공기를 금세 축축하게 하는 일. 바깥에 나가서 몇 발자국을 걷다보면 마스크가 코와 입에 달라붙어 호흡이 서서히 가빠지는 일. 어디서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흘러나온 땀이 온몸을 끈끈하게 휘감는 일.
여름날에 출근하는 직장인의 관점뿐만 아니라 클래식 코디네이션을 애호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도, 여름은 불유쾌한 시절이다. 나는 계절의 복판에 다가서기도 전에 벌써 기가 꺾이고 만다. 재킷-셔츠-팬츠-긴양말-구두라는 기본 차림을 더 이상 유지할수 없는 때가 왔다는 사실에 조금 울적해진다.
울이나 면 재킷을 입은 마지막이 지난 5월 중순께였다. 직장에서의 공식 행사를 위해 걸쳤던 재킷은 하루 내내 무겁고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서 의류관리기에 한번 넣었다 빼낸 다음, 수트케이스를 씌워서 옷장 깊숙한 곳까지 쑥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며칠을 재킷 없이 옥스퍼드 셔츠차림만으로 버텼지만, 뽀송해지기는커녕 땀으로 범벅이 되어 돌아오는 날들이 더 많았다.
결국 6월이 되기도 전에 여름 옷들을 꺼냈다. 옷들을 꺼낸다는 건 문자 그대로 끄집어냈다에 그치지 않으며, 다가오는 계절에 입을 워드로브 전체의 상태를 미리 점검하고 미리 손질해두는 일을 모두 포함한다. 주말 하루를 잡아 옷들을 점검했다. 순서는 여름 옷들 전부를 물세탁하는 것부터다. 옷감의 변형이나 찢어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제는 울샴푸, 세탁기는 울(섬세) 코스로 작동시킨다. 세탁이 끝난 옷들을 세탁할 때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건조기를 쓰지 않았고 탁탁 털어서 옷걸이에 건 다음, 자연 건조했다. 마지막은 다림질. 옷가지를 하나씩 스탠드형 다리미에 걸어서 스팀을 쪼이거나 다림질판 위에 올려 구김을 말끔히 편다.
그렇게 손질을 마친 옷들은 피케 셔츠와 린넨 셔츠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다. 피케 티셔츠는 반팔로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 입는 것들이며, 린넨 셔츠는 긴팔로 30도를 밑도는 날에 소매를 둘둘 걷어 입는다. 핏 면에서 다른 점은 피케 셔츠는 상체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붙는 사이즈고, 린넨 셔츠는 상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게끔 넉넉한 사이즈여야 한다.
두 가지의 선택지는 매우 다르지만 하나의 기준에서 다시 만난다. 복장이 나라는 인간의 품위를 해치지 않을 것. 최소한의 단정함을 잃지 않을 것. 설령 불비같은 폭염이 쏟아지고 땀이 폭포처럼 흐르는 날이라고 해도.
목 부분이 U자인 일반적인 티셔츠들은 그런 기준에서 전부 탈락이다. 겉감이 매끈하게 실크처럼 가공되었거나 간결한 디자인의 티셔츠라고 해도, 티셔츠는 태생이 내의이기 때문에, 후줄근한 느낌 없이 입기란 무척 어렵다. 옷을 입고 갈 장소가 슈퍼마켓이나 친구네 집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직장에서의 복식은 최소한의 단정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름날의 단정함에대한 내 정의는,피케 셔츠와 린넨 셔츠다. 다시 둘의 공통 요소를 추출하자면 첫째는 칼라가 달려 있느냐고 둘째는 앞섶을 여미는 단추가 달려 있느냐가 된다.
여름 옷들을 꺼내서 세탁하고 다림질을 마친 후에 걸어두었다. 왼쪽부터 흰색, 엷은 회색, 엷은 베이지, 진한 갈색, 와인, 진한 녹색, 감색, 검정색까지 8점의 피케 셔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