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장난 속에서 프랑스인으로 탄생한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
살면서 우리는 인생에서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적으면 두어 번, 많게는 네다섯 번이 아닐까 합니다. 기회라는 것은 항상 언제 온다는 예고 업이 찾아오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쉽게 그 기회를 잡아내지 못합니다. 분명 기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찾아갔겠지만 소리 없이 찾아가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기회를 손에 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운이 따를 때도 있겠지요. 저 같은 경우에도 과거에 제 나름의 노력으로 기회가 왔을 때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쟁취할 만큼이 노력이 아니었는지 실패를 맛봤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회를 날리며 아쉬워해보니 기회라는 것은 꼭 준비된 사람만이 잡아낼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고 있는데요.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리고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들에게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기회라는 것이 때로는 운으로 찾아왔던,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마다 본인의 능력으로 항상 쟁취해내며, 프랑스라고 하는 이곳의 역사를 새로 썼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시작은 프랑스의 루이15세가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라고 하는 작은 섬을 사드리면서 시작됩니다.
코르시카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있는 작은 섬으로 사실 이탈리아였지만 지금 현재는 프랑스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은 작은 몸집을 가졌던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과 닮아 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는 제노바로부터 작은 섬을 사드리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이 세상을 바꿀만한 사람이 한 명 태어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입니다. 제노바로부터 섬을 사고 1년 뒤에 태어난 나폴레옹.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사람으로 태어나야 했지만 프랑스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것인데요. 이탈리아 지역이었고, 프랑스가 사드리게 되면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가짜 프랑스인이라고 불리며 그에게는 가짜 프랑스인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됩니다.
몰락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던 나폴레옹은 10살이 되는 해에 브리엔이라는 군사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더 이상의 후원을 받을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나폴레옹은 기회라기보다는 어려운 삶을 사는 가짜 프랑스인은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굳이 기회라고 한다면 프랑스가 제노바로부터 프랑스를 사들였던 것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흙수저 같은 삶을 살았던 나폴레옹이지만 군사학교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학생이었습니다. 사실 작은 키로 체구가 작았고, 못생긴 외모였던 나폴레옹은 주변 사람들이 출생까지 알게 되면서 그를 가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남들보다 학업에 더 열중했던 노력파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잘했던 것은 아니었고, 천재로 불렸던 학생도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남들보다 뛰어났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수학과 역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태어나기 전에 자신의 섬이 프랑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외국인이었던 나폴레옹, 가짜 프랑스인이라고 불리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학교에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역사를 배우면서 남들보다 더 큰 애국심을 키워왔던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은 루이 16세가 장교 임관 서류에 서명하면서 프랑스 포병 장교로 임관하게 됩니다. 아마도 루이 16세는 그때 나폴레옹의 기지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데요. 나폴레옹은 유독 특출 났던 부분이 수학과 역사였고, 수학적 지식을 사용하는 포를 사용하는 포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이후에 포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많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은 툴롱 지역에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했던 일입니다. 일개 장교로 있었던 나폴레옹은 설치되어있었던 포들의 위치가 우리 군에게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설치되어있었던 포들의 위치를 임의대로 바꾸게 됩니다. 당시, 그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던 지휘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임의대로 포들의 위치를 바꿨던 것인데, 그것이 나폴레옹의 인생을 바꾸게 될 하나의 기회로 전환되게 됩니다. 영국군에게 포위되어있었던 상태에서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을 포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승리하게 됩니다. 사실상 왕당파의 반란을 제압하는 전투를 직접 지휘하게 되었고, 그들의 반란을 손쉽게 진압하면서 나폴레옹은 24세에 별 하나를 달며 포병 전단을 이끌게 됩니다. 당시 보병과 포병 장교들은 어지러운 시기의 프랑스에서 망명을 선택하게 되었고, 보병의 3분의 2 가량 / 포병의 3분의 1 가량의 장교들이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국에 나폴레옹은 승리를 이끌었던 전투에서 파리로 돌아왔을 때 프랑스혁명은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정권은 자코뱅파가 가지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이들을 열렬히 지지하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돌아왔던 나폴레옹은 자코뱅파를 이끌고 있었던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이 나폴레옹의 기지를 알고 그의 형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게 추천을 하려 했지만 결국 공포정치를 펼치던 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서 나폴레옹을 기용해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자코뱅파를 지지했던 나폴레옹에게도 피해가 가게 됩니다. 자코뱅파와 깊은 관계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군인 신분으로 오랫동안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금방 풀어주게 됩니다. 그렇게 풀려난 후에도 나폴레옹은 극변하는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혁명적 이상이 사라져 버리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갈 곳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하루하루 불편한 마음과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데요.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나폴레옹에게 하늘은 그를 지옥에서 건져내는 구원의 손길을 보내게 됩니다. 나폴레옹에게 하나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왕당파가 방데미에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됐고, 총재정부는 이를 수습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총채 정부 관리인 바라스는 역사의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뻔했던 나폴레옹을 떠올리게 되면서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그를 등용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둘도 없는 기회라고 여기며 이곳에서 공로를 세우고자 노력했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진압합니다. 큰 공을 세운 나폴레옹은 그렇게 파리 수비 사령관이 되는데요. 이렇게 다시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된 나폴레옹은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남자들에게는 항상 따라오는 게 있었으니 금은보화는 물론이고 뭇 남성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던 여인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폴레옹에게도 그러한 여인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조세핀입니다. 나폴레옹 하면 조세핀, 조세핀 하면 나폴레옹이 떠오를 정도로 나폴레옹에게는 조세핀이라고 하는 여인이 매우 큰 존재였습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이 죽기 전에 한 말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조세핀이라고 할 정도이니 나폴레옹의 정신적인 부분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세핀이라고 하는 여인은 사실 미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조세핀이라고 하는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외모부터 지적인 능력 그리고 남자를 끌어줄 수 있는 리더십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데요. 하지만 왜? 조세핀은 당시에도 유명하고 능력 좋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키 작고, 못생기고 심지어 가짜 프랑스인이라고 불린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온 나폴레옹을 선택하게 됐을까요? 조세핀은 아마도 나폴레옹의 먼 미래를 보았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비록 키는 작았지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그로부터 나왔던 그의 야망의 크기는 그 어느 누구보다 컸다는 것을 느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둘은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폴레옹의 야망을 느낀 조세핀은 나폴레옹이 가져올 먼 미래의 변화를 보았고 그래서 나폴레옹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나머지 항상 펜을 들고 편지를 쓰며 사랑을 속삭였던 나폴레옹이었는데, 전장에 있을 때 잊지 않고 편지를 쓰며 힘든 전투가 끝났을 때도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편지를 쓴 나폴레옹은 진짜 파리지앵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무서울 게 없었고, 계속해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결혼하고 그 이후에 떠났던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하면서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에 신임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너무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그를 견제하고자 했었고, 나폴레옹을 이집트군 사령관으로 입명하면서 이집트로 보냅니다.
이집트군 사령관으로 떠났던 나폴레옹은 학자 180명과 함께 이집트로 향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정세의 변화를 인지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집트에서 영국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파리로 돌아옵니다.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8일, 당시 혼란한 정권을 향해 쿠데타를 일으켜 정리하면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공화국 제 1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명성과 권력 그리고 사랑을 쟁취했던 나폴레옹은 그 누구도 무서울 것이 없었는데,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하던 오스트리아와 영국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권유하지만 거부하게 되면서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뤼네빌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때 북부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라인강 연안을 손안에 거머쥐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응원과 조국을 위한 마음을 품고 싸웠던 나폴레옹은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확신을 안고 있었고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며 황제에 자리에 오릅니다.
더불어서 나폴레옹은 어지러운 나라를 정리할 법을 제정하게 되는데, 혁명 이전에는 이렇다 할 법이 없었던 반면에 혁명 이후에는 너무나 많은 법령이 쏟아져 나왔고, 이를 집대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것을 실천한 사람이 나폴레옹이었고, 그것은 민법전으로 탄생하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폴레옹 법전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도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스페인 트라팔가 곶에서 프랑스의 해군은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대패하게 되고, 영국을 피를 말려 죽일 생각으로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해전에서는 패배했던 나폴레옹이지만 육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서울 게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함락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전투를 하게 됩니다.
전투를 치르고 나서 지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천천히 군사들을 옮기며 적들을 유인하였고, 본인이 선점해두고 있었던 아우스터리츠까지 유인하게 됩니다. 돌격하여 싸울 것이라고 예상 못하도록 약해 보이도록 하며 적을 속였던 나폴레옹은 짙은 안개를 뚫고 적진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도록 부하들을 보내고 그 틈을 타 고지를 선점하게 되는데, 기동력을 갖춘 포병대를 배치하여 도망가는 연합군을 공격합니다. 이렇게 전략과 전술을 통해 승리를 했던 나폴레옹은 스스로의 업적일 수 있었지만 그 공로를 군사들에게 돌리며, “짐은 그대들이 자랑스럽다”라고 사기를 드높였습니다.
하늘 끝까지 올라설 것 같았던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만나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조세핀과는 헤어지게 됩니다. 사실 세습정치를 꿈꿨던 나폴레옹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그로 인해서 대의를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세핀과 헤어지게 됩니다.
그 이후에 만난 여인이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공주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2세는 로마의 왕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까지가 나폴레옹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나/트리틀란트 전투 승리(좌) 후 베를린 입성(우) 모습)
어떻게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나폴레옹은 결국 스스로 자멸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전장을 누빌 때 항상 있었던 조세핀, 그녀는 나폴레옹의 승리의 여신이었던 것인데 그렇게 헤어지게 되면서 승리의 여신을 떠나보냈던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완패했을 때 영국에게 대륙 봉쇄령을 내리면서 이곳 대륙에 있는 유럽 국가들과 교역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했던 것이 러시아였는데요, 중립 기를 달고 들어오면 들어올 수 있게 해주면서 프랑스를 통해 들어오는 교역 물품에는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서 나폴레옹은 서 갈리시아 지역을 바르샤바 대공국에 편입시키게 되는데, 이 모습은 마치 러시아에게 폴란드의 부활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고, 결국 운명의 장난처럼 둘 사이는 1811년에 깨지게 됩니다.
그렇게 프랑스는 러시아로 원정을 떠나게 되는데요. 러시아는 프랑스 군에 계속해서 밀리면서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내어주게 되는데, 사실 이 모든 것은 알렉산드르1세의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러시아는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내어주었고, 그렇게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입성하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도시가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도시에 들어가 병사들을 재정비할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도시를 버리면서 까지 나폴레옹을 궁지로 몰아넣을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평화협정을 요청하지만 결국 거절당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쳐있을 대로 지쳐있었던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너무나 추운 러시아의 날씨를 견디지 못해 하나 둘 쓰러지게 되었고, 배고픔에 시달리던 많은 병사들도 대열에서 이탈하게 됐습니다. 러시아는 이런 나폴레옹을 그냥 보내주지 않고, 퇴로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나폴레옹을 괴롭혔습니다.
위풍당당하게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원정을 떠났을 때, 약 70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했던 나폴레옹은 파리로 돌아왔을 때 3만 6천 명이라는 적은 인원만이 돌아오게 됐습니다. 가히 전멸이라고 할 정도의 피해를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은 위대한 나라의 역사보다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커지게 되었고, 전쟁터로 내몰려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을 때, 사람들의 불만은 커지게 됐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러시아 원정에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반프랑스 연맹과 또다시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 때,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폐위하게 되면서 통치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엘바섬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등장했던 정부가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였는데, 또다시 나라를 말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워지는 경제와 역행하는 나라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지난날의 영광을 떠올렸는데, 그 영광을 떠올려보니 항상 나폴레옹이 함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엘바섬의 나폴레옹은 이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에게 한달음에 달려갑니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을 본 루이 18세는 도망을 치고 나폴레옹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됩니다. 과거 나폴레옹은 유럽지역을 호령하면서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며 주변 유럽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는데, 유배지에 있어야 할 나폴레옹이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듣게 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던 것입니다. 반 프랑스 동맹은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나폴레옹이라고 하는 어둠의 싹을 잘라내고자 했고, 전쟁광이 되어버린 나폴레옹은 다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연합군과 나폴레옹은 벨기에 워털루 지역에서 만나게 되는데, 치열한 공방 끝에 나폴레옹은 뼈아픈 패배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지난날의 영광스러운 수많은 전투의 승리는 워털루 전투에서 모두 사라지게 되고, 나폴레옹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떠나게 됩니다.
1821년 나폴레옹은 그 섬에서 외롭게 병마와 싸우다 죽게 되는데, 죽기 전에 남긴 세 마디가 너무나도 이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군대, 프랑스, 조세핀. 죽기 전까지도 나폴레옹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비록 가짜 프랑스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나폴레옹이었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이었고, 죽을 때만큼은 진정한 프랑스인이었지 않을까 하는데요.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가지고 있었던 그만의 민족의식을 이해하게 됐는지, 나폴레옹의 유해를 프랑스로 가져오기 위해서 큰 금액을 영국에 지불하고, 파리로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게 되는데, 첫 주춧돌을 놓았지만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한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통과하는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다친 군인들이 치료받고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었던 앵발리드에 안치하는 것으로 장례식이 끝나게 됩니다. 파리에서 장례식이 치러질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운구행렬을 지켜보게 되는데, 추운 날씨에도 시민들은 나폴레옹과 함께해주게 됩니다.
1. 아무래도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을 때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그래도 자기 사람들을 챙겨주었던 나폴레옹의 마지막만큼은 시민들은 끝까지 함께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2. 파란만장한 그의 삶은 역동적인 프랑스의 역사를 새롭게 쓰이게 했고, 실제로 그보다 더 큰 영광의 역사를 안겨다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