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유명 미술관의 그림들을 감상할 때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
유럽미술의 시작은 그리스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크레타섬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대륙이 아닌 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예술적인 위대함은 끊임없이 유럽에 영향을 주었고,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에게까지도 미쳤다. 로마인들은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예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지중해문화의 중심이었던 그리스의 영향으로 로마는 그리스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이상주의에 빠져들었고 그것에 열광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미술은 기독교미술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다. 회화는 당시 높은 문맹률로 인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던 일반인들에게 종교를 전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 인정받아 초기 성당을 장식하는 주된 요소가 되었다.
초기중세 시대의 그림을 일반적으로 비잔틴 양식이라 했는데 비잔틴 미술의 핵심은 종교였다. 미술이 더 이상 예술이 아닌 종교를 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사실주의적 표현은 배제되고 이차원적이면서 원시적인 시각기술만을 사용하였다.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부각시켜 크게 그리고 나머지는 작게 그려서 그림 속에 이야기를 심어야 했기 때문이다.
약 1000년 가까이 중세시대의 미술을 장악했던 보수주의적 미술이 한 천재의 등장으로 변화하게 된다. 1267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난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는 비잔틴 시대에 그려졌던 단순한 도구로서의 그림이 아닌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단면적인 표현이었던 그림에 입체감을 넣어 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조토의 등장과 함께 회화의 개념 전체가 바뀌게 되는데, 그는 더 이상 미술을 기록하는 수법으로 쓰지 않고 성경의 이야기가 내 눈앞에서 전개되는 듯 한 사실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15세기 이탈리아는 아랍과의 지중해 교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아올리게 된다. 부는 곧 예술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고 이탈리아 주요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부각시키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있는데, 메디치가의 영주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는 예술 부흥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여 피렌체시 전체에서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었다. 그 예술가들의 선구자는 마사초Masaccio이다. 그는 15세기 초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에 의해 발견된 원근법을 그림에 도입하여 그림 속에 공간을 창출해냈다. 마사초 이후의 피렌체 미술가들은 원근법이라는 위대한 기술을 배워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기술에 집중한 나머지, 당시 그림들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훌륭히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제와 배경은 사실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한 세대 뒤에 이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피렌체의 몇몇 미술가들이 원근법과 조화로움을 함께 갖추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 중 한명의 미술가였던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는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이를 실현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티첼리는 원근법과 조화로움을 함께 그림에 표현하기 위해 인체의 표현을 왜곡시켰다. 그래서 그림에 등장하는 비너스의 몸에서 어색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진정한 완성을 이룩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가 등장한다. 다 빈치는 진정한 천재이자 열정이 가득한 한 인간이었다. 그의 끊임없는 관찰과 도전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이루어 내었다. 또한 과거에는 천한일로 여겨졌던 미술을 철학과도 같은 진정한 학문의 가치로 이끌어내었다.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부엌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르네상스 초기에 미술가들이 연구하던 모든 분야를 해결해준 작품으로 완벽한 구도, 인물과 배경의 조화로움, 인체의 비율까지 고려한 그 시대 최초의 작품이다.
이어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에 대한 추구와 그 성공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37세에 요절) 그 결과는 크고 연속적이며 언제나 최고의 질을 보장하는 완성품들이었다. 그 중 <아테네 학당>은 16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유럽 ‘역사화가’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전성기 르네상스를 빛낸 최고의 거장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보다는 조각에 관심을 갖고 인체 해부학에 몰두하였다. 그의 열정이 담긴 걸작 <천지창조>를 보고 있으면 당시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그림에 도입하기를 꺼려했던 어려운 자세를 완벽히 표현하고 있으며, 그림속의 인물들의 움직임에 따른 근육의 변화까지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이전의 그 어떤 미술가도 누리지 못했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들에 의해 로마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베네치아에서 또 한 명이 거장이 탄생한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는 레오나르도에 의해 만들어진 삼각형 구도의 틀을 벗어나서 그림을 그려도 색체의 명암과 빛을 이용하여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빛과 공기와 색채를 이용하여 그림의 중심을 완벽히 만들어냈으며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완성된 미술을 창조해냈다.
1500~1520년 사이에 이 네 명의 천재들이 동시에 등장하여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는 곧 미술의 완성이라 많은 이들에게 인식되었고 미술은 이제 더 이상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을 듯 여겨졌다. 더 이상 해결할 문제점이 없자 미술은 곧 정체되어 변질되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시기를 매너리즘이라 부른다. 매너리즘 시대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과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것에 얽매여 그 한계를 뚫지 못하며 정체된 시기를 말하는데 이 시기에도 몇몇 화가들은 새로운 미술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 중 대표적 화가는 티치아노의 제자였던 틴토레토Tintoretto이다.
그는 그림을 표현하는 법에 대한 오류를 찾아내게 된다. 르네상스 그림들은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교훈적으로 미화시켜 그리는 경향이 강하였다. 틴토레토는 이러한 교훈적인 그림이 아닌 성경 속에 있는 내용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좀 더 빛의 효과를 이용하여 인물을 강조하였고 인물들의 동작을 좀 더 격동적으로 표현하여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틴토레토를 통하여 르네상스의 미술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미술이 아닌 과거의 미술이 되었고 이제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미술이 태동하게 되었다.
⑥ 바로크
르네상스의 기술적인 발전과 매너리즘의 감성적인 발전이 융합되어 보다 격정적이고 극적인 미술이 등장하는데 이 시대를 우리는 바로크라 부른다. 유럽은 신대륙 발견과 함께 경제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뀐다. 이에 이탈리아 주요 경제도시들이 몰락하게 되고 미술 또한 빛을 잃어가게 된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부를 유지할 수가 있었고, 1517년 종교개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종교개혁을 펼칠 당시 미술을 적극 활용하게 된다. 이는 곧 바로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로마에서 불붙은 바로크 미술의 발전은 밀라노 출신의 카라바조Caravaggio와 함께 예술의 한 장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순간의 장면을 포착하여 그림을 그리길 좋아하였는데 그 장면들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빛을 이용해 보다 강렬하게 나타나는 형태의 그림을 완벽히 그려내었다.
카라바조는 이후 플랑드르 출신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프스 이북 최고의 화가로 떠오른다. 루벤스 이전의 플랑드르 화가들은 대부분 작은 그림만을 그렸다. 그런데 루벤스는 이탈리아로부터 성당과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거대한 그림을 선화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귀족들과 군주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루벤스가 알프스 이북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을 때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에 의해 또 다른 바로크 미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궁전 미술가로 활동을 하면서 대부분 왕과 왕족들을 위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남긴 <시녀들>이란 작품을 통해 그는 과거의 멈춰진 모습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순간의 모습을 포착하여 표현한 최초의 그림을 그린 화가로 후에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17세기 들어와 이탈리아 미술이 쇠퇴를 하면서 이제는 유럽 전역에서 미술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아랍과의 지중해 무역의 쇠퇴와 함께 아메리카를 통해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 되었고 이는 곧 새로운 신흥 강국들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 중 하나로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활약했던 네덜란드는 17세기에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그 부는 자연스럽게 예술의 발전에 기여를 하였다. 네덜란드가 낳은 가장 위대한 미술가인 렘브란트Rembrandt도 이 시기에 활동했던 미술가로 단순하게 보여지는 그림이 아닌 감정이 깃든 그림을 탄생시키며 새로운 미술의 장을 열었다.
신고전주의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비속하고 추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였다.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주의 미술과 흡사한데 이와 구분하기 위하여 신고전주의 또는 아카데미학이라 부른다.
오랜 이탈리아 중심 예술에서 19세기에는 유럽의 강자 프랑스로 자연스레 중심이 옮겨지게 된다. 프랑스의 예술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학문으로서의 미술이 성장하게 되는데 그 중심은 왕실이었다. 아카데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가 개최 되고, 여기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미술가들이 소비자에게 의뢰받은 작품 활동을 하는 형태에서, 형식과 주제의 자유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1789년에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이러한 주제의 틀에서 자유를 찾은 화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모습을 반영한 신고전주의는 이렇게 파리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다비드Jacques-Louis David는 신고전주의의 대표화가로 <사비나 여인의 중재>라는 작품을 통하여 이름을 날리게 된다. 당시 프랑스 혁명 후 좌파와 우파의 갈등을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당시 계속되는 갈등에 지쳐있던 파리 시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다비드 세대의 미술가들 중에는 위대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도 있다. 고야는 일생을 궁정화가로 살았는데 그는 보수적인 카톨릭 군주국이었던 스페인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그림, 누드화, 초현실주의적 그림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에 반하는 미술 사조로 등장하였다.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고, 또 개성을 존중하여 개인의 상상과 주관적 해석을 존중하는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의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오귀스트-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였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고전기의 영웅 미술을 숭배했다. <샘, 1856, 오르세미술관>은 여성의 몸에서 조화와 균형미를 통해 미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앵그르의 반대자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외젠 들라쿠르와EUGÈNE DELACROIX(1798~1863)였다. 들라쿠르와는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지닌 인물로 대상의 정확한 표시와 그리스-로마시대 조상의 끝없는 모사를 거부했다.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파리 루브르박물관>은 1830년 7월 혁명을 소재로 하여 그린 작품으로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삼색기의 3가지 색깔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 밑에 죽어 있는 남자는 훈장을 건 귀족으로 낡은 봉건체제의 종언을 의미한다. 들라쿠르와는 이 그림을 통해 민중이 역사의 주체자라는 이념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낭만주의가 등장하면서 몇몇 화가들은 풍경화를 미술의 한 분야로 끌어올리기위해 노력하였다.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자연을 주제로 한 풍경화가로 가장 위대한 화가 중에 영국의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1775~1851)를 빼놓을 수 없다. 영국 근대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터너는 풍경에서 세부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날씨나 대기의 변화에 따라 풍경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순간과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 그의 그림은 다채로운 날씨와 그에 따른 빛의 변화를 장대하게 표현하여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파리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다른 한 쪽에서는 세상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하는 맘을 반영한 그림이 등장한다.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는 사실주의의 대표화가로 그림에 신, 이상화된 영웅,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한 당대의 인물과 그들의 일상,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을 담으려 하였다. 그의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파리 오르세미술관>은 가로 6.8m, 세로 3.15m의 매우 큰 그림인데 당시에 이렇게 큰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들은 왕이나 귀족 또는 신화를 주제로 그려졌으나 쿠르베는 커다란 캔버스 안에 당시에 살아가고 있던 서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이는 당시의 지배계층을 당황스럽게 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혁명을 통해 부각된 민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그림에 사실적인 부분을 강조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과거에는 우리가 보고 있는 빛을 그리는 것이 아닌 배움을 통해 알고 있는 빛을 표현하였다면 이제 마네에 의해서 미술이 빛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1832~1883)가 빛으로 비롯된 순간의 인상을 그려내는 인상주의 혁신을 시작한 것이다. 마네가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린 이라면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그 자체가 인상주의라 할 수 있다.
사실 인상주의는 기존 주류를 이루는 미술계에서 외면당하고, 평단에게서 혹평을 받았다. 마네의 대표작 <풀밭위의 점심식사, 1863년, 파리오르세미술관>은 많은 비판과 함께 살롱전 입선이 거부된 작품이다. 뿐 아니라 모네 역시 살롱전 전시를 거부당하자 스스로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시회에 방문한 한 비평가는 그들의 작품을 벽지보다 못하다며 혹평을 했고 특히 모네의 <인상:해돋이>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아무생각 없이 한 순간만의 인상만을 표현한 그림이라 평하면서 그 전시회에 참가했던 미술가들을 인상에 집착한 단체라 하여 인상주의자들이라 부르던 것이 하나의 미술사조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혹평 속에서 탄생하였던 인상주의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고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사조가 된다.
19세기 역사적인 변화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르느와르Renoir는 모네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원리들을 풍경화에서 실제 생활 장면을 그리는 것으로 확장하였고 드가는 사진술을 통해 표현되는 모습들을 그림에도 반영하여 마치 잘라낸 듯한 형태의 구도에 의한 그림과 실외에서 적용되었던 빛의 표현을 실내에도 적용시켰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뛰어넘었다. 인상주의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려 했다면,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심리 등을 표현하는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 시작은 폴 세잔이었다. 당시의 인상주의 미술은 순간을 표현했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어수선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뿐 아니라 윤곽선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아 그림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폴 세잔Paul Cézanne(1839~1906)은 이러한 인상주의 그림의 단점을 보완하여 보다 윤곽선을 뚜렷하게 표현함과 동시에 빛의 효과 또한 인상주의 화가들과 같이 표현한 그림을 완성시켜서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다각도의 시선을 표현한 세잔 스타일 정물화는 훗날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1886년 파리의 몽마르뜨언덕에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가 도착하였다. 반 고흐Van Gogh는 37살에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할 때 까지, 10년이 채 되지 못하는 활동을 통하여 예술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게 된다. 고흐의 작품을 보면 강렬한 표현 속에서도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렸는데 그는 원색의 색 점과 붓놀림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붓놀림 하나하나는 자신의 격양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면 고흐는 정확한 묘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이 그린 사물들에 대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였다.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어 후기인상주의의 마지막 정점을 찍은 화가는 폴 고갱Paul Gauguin이었다. 그는 반 고흐와의 아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럽을 떠나 타히티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강렬한 태양 속에서 비춰지는 진정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생활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미술을 만들어냈다.
후기 인상주의는 이후 20세기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표현주의란 인간의 내면 그러니까 감정과 감각의 표현과 구성에 주목하는 경향이다. 사실상 후기 인상주의, 추상주의, 상징주의, 입체파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