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가장 사랑받는 비운의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의 인생이야기
얼마 전에 본태 박물관 투어를 진행하는 도중에 인상적인 여행자를 한 명 만났습니다. 그분은 본태 제3전시관 <무한 거울의 방 - 쿠사마 야요이>를 보고 나온 후에 눈물을 흘렸는데 깜짝 놀라 왜 갑자기 우시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자기는 그 방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 공간 속 그 어디에서도 심적으로 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쿠사마의 내적인 상태가 지금 그 무한 거울의 방과 같지 않은가 생각을 해보니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라고 답을 했는데, 저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한 거울의 방>은 그저 이쁜 곳, 여행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만 느끼고 가는데, 그는 쿠사마의 작품을 통해 진정한 자신만의 감상을 느낀 것 같아서였습니다. 사실 쿠사마의 작품은 화려하고 힘이 있지만 밝은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삶 속의 환경, 그리고 선천적 정신질환 인종차별 등 여러 가지의 이유들로 젊은 시절 매우 고난 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쿠사마에 대한 포스팅을 해보려 합니다. 투어에서는 시간 관계상 그리고 흐름상 이야기하지 못했던 그녀의 진짜 인생을...
1929년 일본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에서 야채와 꽃 종장 도매업을 하는 나름 부유한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릴 적부터 선천적 정신 강박증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말을 잘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어머니는 그녀의 그런 장애적 행동을 단순히 부모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오해하여 제대로 된 치료보다는 오히려 구타와 훈계를 했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정신적인 부분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쿠사마의 부모님은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는데 데릴사위였던 아버지는 집안에서 제대로 기를 펴고 살수 없었고 결국 외도를 일삼게 됩니다. 그런 남편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는 쿠사마로 하여금 아버지를 감시하게 하였고,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쿠사마는 아버지가 외도녀와 하는 그런 부적절한 행각들을 목격하면서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만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화풀이 대상으로 또 다른 외부적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런 불안정한 삶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머니의 간섭으로 그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그림 그리는 쿠사마를 못마땅해 했던 어머니가 한 번은 쿠사마가 그림을 그리는데 다가와 그림을 뺏어 버려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때 경험한 공포와 히스테리가 쿠사마의 작업 방식에 영향을 주어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빠르고 간결하게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쿠사마는 가족이 운영하는 꽃밭에 들어가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꽃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마치 그녀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그녀의 작품세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녀의 대부분의 작품은 그날의 경험을 다양한 형태로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쿠사마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술가가 되기 위해 교토 시립 예술 대학에 입학하였고, 1952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 쿠사마는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접하게 되는데 오키프는 주로 자연세계를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우 사실적이기도 한 그녀의 작품에서 쿠사마는 뭔가 특별함을 느꼈고, 이후 오키프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후 오키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예술가로서 가야 할 길에 대한 조언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위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오키프는 그 답변으로 매우 매우 어렵지만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예술의 중심인 뉴욕으로 오길 조언하였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고 용기를 얻어 뉴욕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쿠사마는 당시 외환 거래에 대한 규제가 심해서 일본에서 미국으로 송금하는 것 자체가 금지였고 외국으로 나가기 매우 힘든 시절이었지만 쿠사마는 인생을 걸고 기모노에 달러를 숨겨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뉴욕에 처음 도착한 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뉴욕을 정복하기로 다짐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과 창조적 에너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자 결심합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여자로 활동해야 했고, 게다가 동양인이었던 쿠사마를 당시 뉴욕 예술계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뉴욕 예술계는 여성이 단독으로 개인전을 여는 경우가 없었고 대부분 남자들과 그룹전에 참여해야 했는데, 그 어떤 남자 작가들도 쿠사마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기에 쿠사마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일 조차 처음에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작품조차 전시 못하고 있던 쿠사마는 우연히 쿠사마와 같은 흙 속에 묻혀있는 무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위해 생겨난 브라타 갤러리에서 첫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그의 전시회의 뉴욕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는데, 당시는 잭슨 폴락으로부터 시작된 추상표현주의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던 시대라서 쿠사마의 작품은 정말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쿠사마의 그림은 태피스트리 같기도 하고 입체감이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아버지와 외간녀와 잠자리하는 것을 본 적 있는 쿠사마는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에 섹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 그녀의 강박 신경증이 더해져 <남근의자 (1963)>와 같은 그녀만의 당시의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1966년 3월 카스텔란 갤러리에서 <무한 거울의 방> 이란 색다른 작품을 전시했는데, 당시 인간이 로켓에 몸을 싣고 우주로 날아다니며 '무한'이란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쿠사마는 그 '무한'이란 개념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끌어들여 탄생시킨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을 당시 추상표현주의에 갇혀있던 수많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앤디 워홀과 같이 그 영감을 자신의 예술적 철학에 높여 새로운 작품들을 쏟아내며 그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정작 그 영감을 준 쿠사마는 전혀 유명해지지 않자 거기에 크게 낙담하였습니다. 거기에 쿠사마는 당시 뉴욕의 미술계가 가지고 있던 성과 인종차별로 인하여 자신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울분을 토했습니다.
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쿠사마의 작품들이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1966년 그녀는 베니스 비에날레에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서 피렌체의 한 공장에서 반짝이는 미러볼 1500개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비에날레 주체 측에 허가도 받지 않고 이탈리아 관 앞 정원에 미러볼을 깔아두는 설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당신의 나르시시즘을 팝니다!! 2달러!!' 겨우 몇 달러만 받고 행인에게 작품을 파는 것은 당시의 체제를 전복시킬 만큼 놀랄만한 아이디어였다. 예술은 비싸고 귀하고 얻기 힘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멋진 작품이다!! 주체 측에서는 제발 그만 팔라고 애원하지만 쿠사마는 왜 미술작품을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처럼 팔면 안 되냐고 되묻고 계속 팔았다는 멋진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사실 뉴욕에서의 쿠사마는 작품보다는 해프닝을 통해 더 많이 알려진 작가입니다. 미술관의 고루한 체제에 전위적 사상으로 맞선 해프닝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와 평화와 희망을 전하기 위한 메시지를 다은 해프닝까지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는 해프닝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쿠사마가 뉴욕에서 펼친 나체 퍼포먼스가 일본에선 선정적으로 보도가 되어 오히려 일본에서의 쿠사마의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녀의 고향인 마쯔모토에서는 그녀가 마을의 수치라고 말하기까지 할 정도였고, 그녀가 나온 고등학교에서는 그녀를 졸업생 명단에서 제명시킬 정도로 핍박받았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재선되고 난 후 미국은 더욱더 보수적으로 됐고, 쿠사마처럼 예술의 경계를 허물려고 노력하는 예술가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남성 중심, 미국 중심의 예술계에서 쿠사마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쿠사마가 1960년대 쌓아올린 명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시들해졌습니다. 대중의 관심을 쫓는 과격한 행동만 반복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쿠사마는 갈피를 못 잡고 환멸과 우울에 사로잡혀 더 이상의 뉴욕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미국보다 많이 뒤처져 있던 일본에서의 활동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게 흘러갑니다. 일본 미술계는 쿠사마를 단순히 스캔들의 아이콘으로만 취급했고 가족들조차 그녀를 버렸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참아낼 수 없었던 쿠사마는 결국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살아남게 되었고 혼자서의 삶을 사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던 쿠사마는 정신 치료를 받기 위해 정신병원에 스스로 찾아가 1977년부터 살기 시작하여 지금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만난 의사로부터 정신적 불안함과 함께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을 치료하기 위해 미술을 다시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다시 작품들을 쏟아내지만 대외적으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70년대를 1989년 후지 TV 갤러리에서 쿠사마의 작품을 처음 접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였던 알렉산드라 먼로는 쿠사마의 개인전을 뉴욕에서 꼭 열어야겠다는 확신과 의지를 세우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쿠사마를 만납니다. 그리고 1989년 '쿠사마 야요이 : 회고전'이란 이름으로 국제현대미술센터(CICA)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 전시회는 대중과 매스미디어 예술계 모두로부터 큰 반응을 일으켰고 이 전시를 기점으로 뉴욕과 일본에서 쿠사마의 작품들이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1993년 베니스 비에날레에서 일본 대표로 쿠사마를 선정하고 역대 처음으로 여자 단독 개인전을 열었다. 드디어 일본 미술계에서도 쿠사마를 인정하고 가치를 알아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