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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랑 Mar 03. 2022

빛나는 개인을 선택하지 않겠다

밥벌이로서의_사교육 #15


 빛나는 개인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사람은 언제든 망가질 수 있고 당신은 곧 당신을 망가뜨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 오래다.


 대선이 시큰둥하다. 특정한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아서 그러하다. 어떤 이가 된대서 나라가 망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이가 된대서 세상이 개벽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할 때면 장엄하게 나를 꾸짖는 사람들이 있었다. 철딱서니 없는 나를 비난하며 세상을 바꾼 걸출한 정치 지도자와 그보다는 더 자주, 세상을 망친 정치인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 믿음이 자못 장엄하여 토달지는 않았으나 결국 나를 설득하지는 못하였다.


 그저 개인에 대한 사람들의 과도한 기대감과 혐오감이 나는 시큰둥하다. 누가 되든 대통령이란 언제나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는 존재일 것이고, 그 실망감과 분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우리의 열망마저 잠식하고 말 것이다. '세상이 좋아질 거라는 말은 죄다 거짓말이었고, 거짓말한 너를 나는 혼내주겠다.' 상대편을 혼내주겠다는 분노만이 가득한 지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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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는 날이면 온종일 방구석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도 꿈은 있는 것이다. 빛나는 개인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여러 열망이 지금껏 이 세상을 좋게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나는 오랫동안 진보정당의 당원이었다. 물론 그것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좋은 사람들과 한 편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빌런은 패배하니까. 빌런과 맞선 우리는 이기고 말 거니까.


 물론 승패의 역사로 따지자면 이 세상의 빌런은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진보정당원으로 보낸 10여 년의 시간 동안, 진보정당은 단 한 번도 세상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다. 시작은 미약했고 계속 미약하기만 했다. 정의당원이지만 정의당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나조차 믿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들에게야. 


 그럼에도 굳이 이곳을 벗어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뭐랄까, 아직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단지 주인공만의 몫은 아니라는 것을.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정당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한다면, 정의당은 정당으로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아니 말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잊힌 무수한 사람들을 정치의 이름으로 발굴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결사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당선될 리도 없고 괜히 표나 분산시켜 적을 이롭게나 하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욕이나 먹고 있는 이 정당을 사람들이 계속 하는 이유란 고작 그런 것이다. 이들은 빛나는 개인을 믿기보다는 이 세상의 투명인간들과 함께 한다는 쪽을 선택한 까닭에, 무수히 흔들어도 흔들릴 수 없다. 이들이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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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내가 그의 동료였다는 이유로 그는 나를 자주 괴롭힌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을라치면 괜히 내게 말을 걸어서 애써 끊어낸 끈을 다시 이어버린다. 지금 그는 심상정 대선캠프의 대변인이라는 장엄한 지위를 갖고 있는데, 얼마 전 그가 심상정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진보정치를 지키기 위해 가장 앞장 서 있는, 진보정치가 지켜온 길을 꿋꿋이 걸어온 정치인으로 심상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임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나는 김창인을 믿지 않는다. 또 심상정을 믿지 않는다. 다만 그와 함께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결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믿을 뿐이다. 개인은 패배하나 사람들은 승리한다. 그것이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온 방법이고 내가 세상에 대해 낙관하는 유일한 것이다.


 3월이 되었다. 내게 3월의 가장 큰 의미는 새학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처음 맞이하는 학교들의 학사일정과 내신 수업들을 챙기느라 또 이런 나를 다그치는 학원의 성화에 정신이 없다. 대선이고 나발이고 당장 눈앞에 놓인 밥벌이를 내가 망칠까 두려울 따름이다.


 진보정치를 지키는 사람들의 삶만이 가치 있고 돈벌이에 정신 없는 내 삶은 형편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노고를 불현듯 떠올리고 만다. 네 주위의 투명인간들을 잊지 말라며, 당원들의 헌신은 바쁜 나를 종종 멈춰 세운다.


 나는 빛나는 개인을 믿지 않는다. 심상정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상정에게 투표하겠다. 당선 가능성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투명인간들의 소중한 마음을 지지하면서.


*

 윤석열이 망가뜨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아닙니다.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윤석열을 '이길 수 있는' 사람에게 투표하겠다는 그 마음도 마찬가지로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좋은 세상 만들기를 계속 유예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정치의 유일한 의미라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믿는 좋은 세상에 투표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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