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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랑 Dec 10. 2022

노옥희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나에게 노심조의 노는 노옥희라고 농담할 때가 있었다. 열일곱에 입당해 처음으로 만난 위원장이 노쌤이었다. '진보 정치인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모범이 있다면 그것이 노옥희 아니었을까. 내가 배운 진보 정치인의 바람직한 모습이 있다면 반절 이상은 노쌤의 모습에서 기인한 것이다.


'울산 노동운동의 대모'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진 것치고는 열일곱 어린 당원에게 한없이 부드러웠고 말 한 번 함부로 놓으신 적 없었다. 젊은이를 꾸중하는 대신 당신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어 옆에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좋은 꼰대'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사교육업자가 되고 선생께선 교육감이 되었지만, 작년 여름 뵙고 싶다는 한 마디에 흔쾌히 나와주셔서 별 시덥잖은 소리들을 한참이나 들어주고 가셨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말에 괜찮다며 그냥 나오고 말았는데, 그때 식사라도 함께 했다면 덜 사무쳤을까. 언론에 나오는 근엄한 모습이 아니라 편안한 복장으로 바닷가를 거닐던 그 모습이 괜히 아른거린다.


현대공고에 부임했던 평범한 수학 선생님은 산재로 손목이 절단된 채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제자 때문에 노동운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설적인 울산의 노동운동은, 또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 교육은, 제자에게 도움줄 방법이 없어 고뇌하던 젊은 수학 교사의 마음에 큰 빚을 졌다. 


재랑이라는 개인 역시도. 당신께선 나를 포함해 수많은 세계를 만들어 놓으셨다. 왜 좋은 어른들은 이리도 황망하게 떠나고만 마는지. 선생님께 잘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선생님은 언제까지고 기다려주실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나의 역사가 저물었다. 슬픔이 가슴을 오래도록 짓누른다. 


+)사진을 보다보니 선생과 많은 곳에 있었구나 싶다. 2009년 오늘에도 함께 있었다. 이 정도면 나 역시 노옥희의 제자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만 감히 참칭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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