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인실 다이어리 #1
작년 12월 19일, 십여 년간의 학원 강사 생활을 마치고 정의당/청년정의당 대변인으로 발령받아 국회로 출근하게 되었다.
첫 문장부터 서걱거린다. 학원 강사, 정의당, 대변인, 이 단어들 사이의 간극을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이직의 이유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쭈뼛거린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너무 짧거나, 혹은 너무 장황할 것 같아 그렇다.
월급은 반토막도 못 된다. 출퇴근 길은 좀더 고단해진다. 이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보다는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 가까이 지내야만 한다. 그런데 대변인을 제안 받을 때 내가 들은 첫 마디란 정작 "지금 당이 어렵습니다"였다. 그 말에 머릿속 계산이 죄다 엉키고 말았다. 나도 그만큼은 어려워도 되는 것 아닐까.
https://brunch.co.kr/@unparanmanjang/27 [정의당/청년정의당 대변인으로 발령 받았습니다]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출근 첫 날부터
어렵다는 당의 위상이 어떤지는 금방 알 것 같았다. 앞으로 일하게 될 사무실이라고 소개 받은 곳은 정작 우리 당의 사무실은 아니었다. '비교섭단체 공동공보실'. 국회에는 세 개의 정당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비교섭단체. 국회는 교섭단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교섭단체가 하자면 하고, 못 하겠다면 못 한다. 교섭단체가 듣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날마다 틱틱거린다.
(*교섭단체: 의회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일정 수 이상 의원들이 모여 만든 의원 집단.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20인 이상의 의원으로 구성 가능하다. 교섭단체가 되면 1) 정당 국고보조금을 우선 지급받고 2)정책연구위원을 둘 수 있으며 3) 수십억 대의 입법지원비를 지원 받고 4) 윤리심사(징계)요구, 의사일정 변경동의, 국무위원 출석요구, 의안 수정동의, 긴급현안질문, 본회의 및 위원회에서의 발언시간 및 발언자 수, 상임위 및 특별위 의원선임 등 국회운영의 핵심 권한들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비교섭단체에는 이런 권한들이 주어지지 않는다. 현재 정의당의 의석은 6석이므로 단독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다. 일본은 의원 2인 이상이면 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하다.)
난관이 여기까지였다면 그냥 애처롭기만 하고 말았을 텐데. 국회출입증이 안 나온댄다. 응? 나는 신병에게 건네는 선임 당직자의 '넝담'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출입증은 정말 언제 준다는 건지 기다리고 있었으나, 진짜 없다고 했다.
"정의당 출입증 TO가 다 나갔어요. 국회사무처에다 졸라도 안 주고 빌어도 안 줘요."
"그... 그럼 전 출퇴근은 어떻게 하죠?"
"당장은 방문객으로 들어오셔야 해요."
"제 출입증은 그럼 언제 나오나요?"
"음, 지금 출입증 가지고 있는 사람이 국회를 나가게 되면 ...?"
스탈린그라드의 총 없는 소련군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첫 브리핑을 마쳤다. 하기 전 떨리던 마음과는 달리 간단히 끝났다. 단상에 올라갔고, 브리핑을 했고, 아무 질문 없었고, 그냥 내려와 다시 사무실로 갔다.
원래 이런 건가, 했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앞뒤로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의 브리핑이 있을 때면 기자들도 많고 플래시도 번쩍였다. 괜히 옆에 있다가 어깨빵(?)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단상에 올라설 때면 손아귀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모두들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루에도 두 세 번씩 적막한 기자회견장을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을 이런 브리핑을 하고 있는 게 대체 의미가 있는 건가. 아무 말 않았는데도 수석 대변인께선 내 표정을 읽은 양 이런 말을 건넸다.
"재랑 동지, 우리 별명은 "한편"이에요. 국민의힘이 뭐라고 하고, 더불어민주당이 또 뭐라고 하면 그 다음에야 기사에 뜨는 거지, "한편 정의당은" 어쩌고 저쩌고. 그 "한편 정의당은"이라는 표현 한 번 언론에 실려보겠다고 우리가 이 고생들 하고 있는 거야.
근데 우린 알잖아요, 그 "한편 정의당은" 다음에 오는 말이야말로 거대 양당은 미처 챙기지 않은 목소리일 수 있다는 것. 제도 정치가 얘기하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의 말일 수 있다는 것. 우리를 통해서 약자들이 세상에 던지고자 하는 얘기일 수 있다는 것.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우리의 말이 정녕 그런 말인지가 진짜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수석에게 동지라는 말을 듣는 게 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언젠간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을까.
해가 넘어갔다. 너무 추운 겨울이었다. 국회 본청 앞 정의당 노란봉투법 농성장은 좀만 앉아 있었는데도 금방 코가 시려서 빨리 나오고 싶었다. 이태원 추모 문화제에서는 발이 얼어붙은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다만 눈가는 너무 뜨거웠다.
추운 데가 어디 그곳뿐이었을까. 국회 밖에 서있는 캠프들을 볼 때면 코가 시큰했다. 노조법 2·3조 개정을 위해 단식하는 노동자들, 한국와이퍼 노동자들, 18일간 단식을 이어간 화물연대 이봉주 위원장, 69일 간의 국회 앞 농성을 유지했던 공공임대 농성단, 오늘도 강추위를 견디고 있을 국회 밖 여러 현장들. 저곳들과 견주기에 국회는 너무 따뜻한 곳이었다.
국회의원 6석의 정당, 위를 바라보면 한없이 작아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이기기 힘들다. 그러나 아래를 바라보면 우리가 가진 권한이란 얼마나 큰 것인가. 대한민국 제3당의 청년 대변인, 내 얘길 누가 듣겠는가 싶다가도 이 자리조차 허락받지 못한 국회 밖 많은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그 생각을 금방 지우게 된다.
우리의 별명은 "한편". 그러나 거대 양당이 돌보지 않는, 우리 사회의 어둡고 낮은 한편으로 이 당이 진정 가닿을 수만 있다면 그만한 영광의 별명은 또 없을 것이다. 정의당은 그런 편이기를. 나의 말이 또한 그런 편이기를.
(221219~230106)
※ 이번 주의 "한편 정의당은" (제 명의의 브리핑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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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매주 여러분들과 정의당 대변인실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쁘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