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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Sep 02. 2024

야근 퇴근길 택시에서 장국영이 찾아왔다

나의 끝나지 않을 홍콩앓이에 대하여

때는 1999년. 봄과 여름의 중간 정도 되던 계절.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방송하던 밤이었다. 아마도 토요일이나 금요일 밤이었을 그날.


원래 보던 프로그램도 아닌데, 그날은 TV앞에서 이소라의 오프닝부터 진지하게 보던 날.


그날 이소라의 오프닝 멘트를 기억한다.

원래 일기를 쓰지 않는데, 오늘만큼은 일기를 쓸 거예요.
'나 오늘 장국영 봤다..!'라고.


그리고 흰색의 하늘하늘한 캐주얼 정장을 가볍게 입은 장국영이 걸어 나왔다.


인간의 세련화가 바로 이거구나를 느낄 수 있던 그 모습.


그리고 부른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qgVbKhTXTAo


멋과 여유 그 자체의 몸짓과 함께 너무나 센스 가득 넘치게 노래를 하는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다.


장국영, 그리고 그의 나라, 홍콩에.


한국에서 개봉하는 그의 신작, 성월동화를 홍보하기 위해 내한한 것이었어서 당연히 그 영화를 봤다.


그리고 PC통신에 개설되어 있던 영화 성월동화 페이지에 매일 접속했었다.


나의 1999년은 온통 장국영이었다.


언젠가, 그의 나라 홍콩에 가겠다는 다짐이 17살의 내 안에 피어난 날.


그리고 대학생이 된 2003년.


늦은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


덜컹거리는 1호선 안에서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았는데 뭐라고 하는지가 잘 들리지가 않았는데 그 한마디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


'장국영 죽었대'


순간 눈물이 주르륵. 만화처럼 떨어졌다.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의 부고를 들었던 밤을 기억한다. 순간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17살의 나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날.

그날 내가 어떤 옷을 입었고 날씨가 어떠했는지, 그날의 전철 안 공기까지 기억이 난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어떻게 집에 왔을까.


집에 도착해서 또 한 번 웅크려 울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꼭 홍콩에 가겠다고.


그로부터 시간이 훌쩍 지나 2013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년이 지나 홍콩을 드디어 갔다.


홍콩행 비행기를 타서 이륙하고 홍콩이 구름 사이로 보이는 순간 눈물이 2003년 4월처럼 흘러내렸다.

드디어, 온 그의 나라.


첫 순례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호텔의 현판을 만져보던 순간의 슬픈 짜릿함을 기억한다.


그렇게 3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날, 나는 홍콩 공항의 벽을 붙잡고 울었다.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아쉬워서.


그 후로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히기 전까지 매년, 4월 또는 5월, 그가 떠난 시기가 되면 의례 치러야 할 의식처럼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갔고, 장국영이 홍콩의 자랑이라고 했다던 페닌슐라 호텔도 꼭 갔다. 내게 홍콩은 장국영, 그 자체였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그 해에도 홍콩을 갔는데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 밤이 되면 맥주를 잔뜩 쌓아놓고 홍콩 TV를 보는데 그 시기에 홍콩도 레트로 감성이 트렌드였는지 가장 홍콩이 홍콩스럽게 빛나던 80-90년대의 영화, 드라마 하이라이트를 편집한 영상이 끊임없이 나왔다.


아름답던 유덕화, 코믹 연기마저도 멋있는 주윤발, 숨 막히게 예쁜 임청하와 왕조현.. 그 사이에 장국영이 있었다.


너무나 그윽하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그 짧은 장면이 계속 보고 싶어서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영상의 BGM이었던 Nothing‘s gonna stop us now가 tv에서 흘러나오면 호텔방에서 창밖을 보다가도 반사적으로 일어나 장국영이 나오는 장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해의 홍콩여행은 그 우수에 찬 장국영의 눈빛이었다. 1999년의 재림이었다.


다시 또 내년을 기약하며, 짧은 홍콩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아쉬움과 아까운 사람에 대한 회한에 늘 눈물이 났었다.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늘.


비행기 창밖 너머 홍콩이 멀어질 때마다 슬펐다. 다시 또 오리라는 다짐과 생각에 잠기며 맥주를 마셨고 그래서인지 인천공항에 내릴 때는 대부분 만취상태.


홍콩에서 잔뜩 충전해 온 감성으로 1년을 버티고 홍콩으로 또 떠났다.


여행 기간 내내 tv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장국영의 그 시절 눈빛이 너무나 간절했다.


하지만 삶이란, 감성 따위는 저 멀리 산에 묻고 현실로 속히 복귀하지 않아서는 안되는 잔인한 것.


멀어지는 홍콩을 뒤로하며 See you Leslie를 읊조리던 때가 언제냐 싶게 택시비가 지급되는 야근 타임, 밤 10시를 꽉꽉 채워가며 일에 몰두하던 샐러리맨으로 복귀하는 건 순식간.


그날도 작업복에 불과한 트렌치코트에 원피스 정장을 입고 화장이 거의 지워질 정도의 피곤에 찌든 상태로 카택 또는 타다 택시를 불러 퇴근하던 날.


어둠이란게 없는 강남의 거리에서 집에 가기 위해 반쯤은 가수면 상태로 택시에 타 눈을 감는 순간.


라디오에서 Nothing‘s gonna stop us now가 흘러나왔다.


순간 장국영의 눈빛이 데자뷔.


https://www.youtube.com/watch?v=3wxyN3z9PL4


흔들리는 선릉역 일대의 불빛들이 침사추이의 한 곳으로 비칠 정도의 강렬한 환각.


그날 한강을 건너며, 홍콩 가야겠다를 나직이 혼잣말했지만, 현실의 안개에 갇혀 작년에서야 다시 간 홍콩.


그의 회고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페리 터미널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웃으며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안녕, 나의 17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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