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무슨 매사에 열심이다. 성실함으로는 세상 따라올 사람이 없다. 다만 성실함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가끔 문제가 될 뿐이다. H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한 선배의 표현에 따르면 'H는 산은 참 잘 오르는데, 종종 "이 산이 아닌가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성이 비단처럼 고운 나는 H의 뒤통수를 갈길지언정 그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참지 못하고 결국 H의 뒤통수를 갈기는 것도 반드시 삼 세 번 기회를 주고 난 이후이다. 나는 공자님으로부터 '군자' 공인인증서를 하사받은 훌륭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
“H야, 1박 2일 지리산 등반 준비해야겠다. 지원부서에 얘기해뒀지?” “네!”
“H야, 노파심에 얘기하는데... 딴 건 몰라도 침낭은 꼭 챙겨라. 침낭 없이 자다간 입 돌아간다.” “네!”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리 찾니?” “네~ 수경 찾고 있습니다.”
“그건 왜?” “네, 지리산에 가면 깊은 계곡이 있을텐데, 거기서 수영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산에서 수영하고 싶다니. 그럼 채비하는 김에 오리발도 가져가려무나 허허... 그런데 침낭은 잘 챙겼지?” “아, 참…”
...
“H야, 언제 출발하니?” “네, 이제 가시면 됩니다!”
“H야, 초행길이니 내비 켜고 가자.” “에이~ 폼 안 나게... 요즘 길 안내가 잘 되어 있어서 그거 보고 가면 돼요~”
“그래? 그럼 나 좀 잘게. 부탁해~” “네!”
“H야, 그런데 얼굴에 해가 자꾸 들어오네. 혹시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거 아냐?” “어… 그런가요?”
“H야, 여기 춘천 근천 것 같은데…” “앗, 어떡하죠?”
“H야, 네비 켜라.” “네…”
“이제 잘못될 일은 없겠지... H야, 그럼 나 이제 진짜 잘게.” “네!”
...
“H야, 왜 멈췄니?” “아무래도 타이어 펑크가 난 것 같습니다.”
“시간도 좀 있으니 긴급출동 서비스 부르자. 회사 차니까 비용 걱정할 것도 없고...” “제가 타이어 많이 갈아본 적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바로 앞에 타이어 가게도 있구요. 제가 금세 해결하겠습니다. 회사 돈도 돈인데, 아껴야 잘 살죠!”
“H야, 다 갈았니?” “네… 근데 뭔가 좀 이상해서… 차가 좀 기울어진 느낌이 들어서요...”
“H야, 타이어 사이즈가 안 맞네…” “앗! 어쩐지…”
“긴급출동 서비스 부르자.” “네!”
...
“H야, 이제 근처 도착했나 보네?” “네!”
“이미 해가 넘어갔으니 저녁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등산 시작하자.” “네!”
“그런데, 등산로는 알아봤니?” “앗, 그건 아직…”
“그럼 등산로는 내가 저녁 먹고 찾아볼 테니, H는 더블 체크해.” “네!”
“H야, 등산로를 지도에 붉은 선으로 표시해 봤는데, 혹시 오류는 없을까? 입산 금지된 곳이라든가…” “아, 중간에 토끼가 많이 사는 곳이 있습니다!”
“H야, 그런 거 말고 중요한 오류가 없는지 봐달라는 얘기거든?” “네, 근데 붉은 선 말고 푸른 선으로 표시하면 안 될까요?”
“XX놈아…”(중얼거리듯 욕설을 내뱉고 난 나는 따악 하고 H의 뒤통수를 갈길 수밖에 없었다) “...”(H는 사슴 같은 눈망울에 원망함도 없는 구슬픈 눈빛으로 '아파요'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H의 성실함 때문에 그를 차마 내칠 수는 없다. 뒤통수를 후리고 난 직후 그의 아득히 깊은 눈,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는 눈썹, 그리고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직각의 작은 어깨를 보면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왈칵 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 딸에게도 이렇게 미안한 감정이 든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H가 20대 신입직원과 다음과 같은 뜬금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듣고 있노라면 내 감정이 1단계에서 임계점까지 무정차 직행하는 것을 느낀다.
"Y님, Y님은 착하니까... 제 생각에 Y님이 죽으면, 못 가도 연옥은 갈 것 같아요.""아하하 네에...? 그래도 지옥은 아니네요. 아하하하..."
H야, 니가 좀 가주라 연옥... 응? 내가 연옥 영혼을 위해, 너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길 기도 매일매일 바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