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사저 앞 시위에 대하여 신평 변호사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날 선 발언을 이어가는 중 눈에 들어온 표현이다. 진 전 교수는 신 변호사처럼 "배울만큼 배운 사람"의 행동을 힐난했고, 이에 따라 '배울만큼 배운' 신 변호사는 "학문적 성취나 그런 면에서 그가 나를 이렇게 업수이 여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많이 배운 분들 간의 대화라, 그들만큼 배우지 못한 이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언론은 그들의 대화를 따옴표로 묶은 뒤 배드민턴 코트에서 셔틀 시키듯 입씨름 경기를 중계한다.)
과거에도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조차"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못한다고 탄식을 한 바 있다. 나는 대체로 그녀의 인식에 동감하는 편이지만,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이란 표현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그럴듯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을 한꺼번에 주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면죄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못 배워서 그랬겠지.
나는 "배울만큼 배웠다"라는 표현이, 배움의 목적이 마치 박사학위를 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이란 표현이, 먹고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으면 괜찮은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목적은 결국 잘 사는 데 있는데, 과연 잘 사는 삶에 한계가 있을까? 그럴듯한 삶은 어찌 보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키르기스 작가인 칭기즈 아이뜨마또프(Chingiz Aitmatov)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매일매일 인간이 되는 것(The hardest thing for a human being is to be a human everyday)'이라고 간파한 바 있다. 매일매일 배우지 않으면 매일매일을 인간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배울만큼 배운" 이들은 사실 우리 회사에도 한가득이다. 순환보직 체계에서 어쩌다 일부 업무에 대하여 좀 익숙해지면 이들은 이내 스스로를 전문가(배울만큼 배운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배운 이들이,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가 무섭다.
소학은 어떻든가? 글이 아니라 몸과 같았습니다. 스스로 능히 알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랬지, 그랬겠어. 그랬습니다. 물 뿌려 마당 쓸고 부르면 대답하는 일이 근본이라고 했는데, 그 분명함이 두려웠습니다. (김훈, '흑산')
"배울만큼 배운" 대신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대해 책임이 있는"이란 표현이 어떨까?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대신 "우리 사회의 일상을 지탱하는"이란 표현이 어떨까? 글이 아니라 몸과 같아야 배움과 삶이 하나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