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장관의 청담동 술집 파티 의혹(feat.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하여 한 장관이 허위라고 주장한 데 대하여 민주당의 의견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이수진 의원이 답한 말이다.
정치인의 발언에는 수사가 없을 수 없고, 선동을 통하여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것은 정치인의 생리이기 때문에 보통은 무슨 말을 들어도 허헛~ 하고 넘어가는 편인데, 가끔씩 굵은 생선 가시처럼 목구멍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발언들이 있다. 얼마 전에는 장혜영 의원의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이란 표현과, 진중권 작가의 "배울만큼 배운"이란 표현들이 그러하다. 이런 표현들에 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내 삶의 궤적이나 핵심 가치관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도 해봤다. 내가 특별히 마뜩잖게 느끼는 정치인들의 표현을 전부 다 모아 분석해보면 나라는 사람을 스스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화는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다. 화를 내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오죽하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도 '인간실격'에서 다음과 같이 화를 마주할 때 느끼는 공포심을 고백하지 않았던가.
저는 화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나 악어 보다도, 용보다도, 더욱 무서운 동물의 본성을 봅니다. 평소에는 그 본성을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만, 어떠한 기회에, 예를 들자면 소가 초원에서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탁 하고 배에 있는 등에를 때려죽이듯이, 느닷없이 인간의 무서운 정체가 분노에 의해 폭로되는 모습을 보면, 저는 항상 머리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이 본성 또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격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제 자신에게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아야 참된 군자이니, 마찬가지로 참된 군자라면 남이 나를 비방하더라도 혼자서 조용히 화를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리석음은 모든 이들이 지니고 있는 본성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추천한 방법과 같이 "술집에 갔어요?"라는 질문에 대하여 "밥집에 갔는데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보다 발랄한 모드로 "혹시... 여기가 술집인가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언은 국회 모독죄에 해당할 수가 있으니 국무위원인 그의 선택지가 되기는 어렵다.
세네카 또한 '화에 대하여'에서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화란 일차적 생리반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거나, 맥박이 빨라지거나 동공이 확대되거나 하는 것들이 생리반응이다. 그는 화를 내는 것은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논리적으로 파악한 후 상대방에 대해 반응하는 이차적인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지배한 뇌가 내리는 광폭하고 공세적인 행위지만 어쨌거나 이성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은 스스로를 화염지옥에 던져 넣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는 화에 몸을 맡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타이르며, 화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니 끝끝내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하며 글을 맺는다. 그러니 한 장관은 혼자서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아예 화를 내지 말았어야 참된 세네카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화, 이해하면 사라진다'라는 책을 쓴 일묵 스님은 “훌륭한 뇌과학자나 심리학자라도 화를 참는 건 쉽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단 화는 쉬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화를 이해하고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화를 쉽게 보지 말고, 정면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화 자체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화는 더 이상 세력을 키우지 못하는 태풍처럼 북상을 멈추고 마음 한편에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소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불교의 가르침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귀결된다. 화 또한 마음이 거칠게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사포로 윤이 나게 닦다 보면 어느새 화는 사라지게 되어있다. 이는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부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한 장관이 불교 신도였다면 따끔하게 한 마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도 어려우면 ADHD를 추천한다. '젊은 ADHD의 슬픔'을 쓴 정지음 작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집중력이 너무 부족해 원망에 공들이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 탓은 지루했다. 남을 오래 원망하려면 내 마음속 후줄근한 여인숙에 대상을 장기 투숙시켜야 했다. 하지만 나를 100 퍼센트 사로잡는 건 늘 나뿐이었다. 나는 타인에게 향하는 관심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호감이나 악감정, 둘 다 마찬가지였다. 내 사랑과 복수는, 그게 사랑이든 복수든, 몇 밤 자고 나면 홀랑 잊히며 사그라들었다.
이처럼 화에 대하여 별처럼 많은 책들이 깨알처럼 주옥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수진 의원의 주문은 결코 퇴근길에 치킨 주문하듯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치킨 한 마리 주문할 때에도 적정한 셈을 치러야 하는데, 한 번도 제대로 시도해 본 적 없는 도를 닦으라는 주문에 대한 반대급부는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값을 치르지 않는 주문은 반려할 수밖에. 의심 또한 마음의 병이니, 혼자서 의심하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