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쁠수록 선명해지는 것들, 나는 어떻게 일해야 즐거운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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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초여름의 기록입니다.
올해 봄,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저는 최근 몇 달간 본의 아니게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회사에서의 역할이 점차 커지면서 스스로 맡아서 해야 하는 일이 급격히 많아졌거든요. 처음엔 좀 더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았는데, 밀려드는 업무량을 견뎌내다 보니 저녁만 되면 피로에 눌려서 쓰러져버리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좋은 점도 있었어요. 오랜만에 '일하는 나'가 어떤 사람인지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거든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방향을 정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만의 '일하는 방식'이 새롭게 체득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일과 생활을 균형 있게 조율하려 애쓰는 편이지만, 나를 제대로 돌아보기 위해서는 가끔은 이렇게 일에 푹 빠지는 시기도 필요한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한동안 ‘일하는 나‘와 조금 멀어져 있었는데, 요 몇 개월 일에 깊이 집중하다 보니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면의 본능이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일이 바쁠수록 본능과 직관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일이 지나가고 나서야 '왜 그때 내가 그렇게 했을까?' 돌이켜보게 되더라고요. 어떤 순간에는 "맞아, 나 일할 때 이랬었지…" 싶을 때도 있고, 또 어떤 순간에는 "내가 왜 이렇게 반응하고 있지?" 싶어 질문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또 거의 항상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스스로의 성향을 새롭게 자각할 때마다 "나의 이런 면이 동료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스트레스가 되는 걸까" 하고 고민하게 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적으로 나와 잘 맞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인 누구이며, 나와 잘 맞는 환경과 잘 맞지 않는 환경은 어디일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타고난 성향을 억누르는 것보다는 살릴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게 더 좋을 테니까요.
최근 몇 달 스스로를 관찰해 본 내용을 간단히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저는 한 분야에 진득하게 머무르기보다는 여러 분야를 두루 건드리며 일하는 걸 더 편하게 느낍니다.
동일한 종류의 업무를 계속 반복하면서 기술적인 전문성을 기르는 것보다는, 업무 A에서 업무 B, 업무 B에서 다시 업무 C로 이동하는 흐름을 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는 걸 선호합니다. 그렇게 해야 뇌가 환기되고 에너지가 잘 도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리더와 면담을 할 때도 거의 항상 '요즘 A를 많이 했으니 다음 반기에는 B를 시켜주셨으면 좋겠다' 고 요청을 했던 것 같아요.
현재 제가 속해 있는 팀은 일의 스펙트럼이 넓은 편입니다. 학구적인 자세로 내용을 깊이 파고드는 업무도 있고, 고객을 직접 만나서 서비스를 셀링해야 하는 업무도 있어요. 그런 점에서는 저와 잘 맞는 환경이라고 느낍니다. 팀을 굳이 이동할 필요 없이 팀 안에서도 비교적 다양한 방식으로 머리를 굴릴 수 있으니까요. (물론 가끔씩, 서로 성격이 다른 일을 동시에 '빠르게'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뇌에 부하가 걸리긴 합니다….)
둘째, 만드는 일을 할 때는 쉽고 빠른 방식보다는 어렵고 느리더라도 꼼꼼한 방식을 택하는 편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거의 항상, 효율보다 완성도를 우선시하게 되는 것 같아요. PPT만으로 대충 만들어도 되는 이미지를 어도비 프로그램을 2-3개 쓰면서 만들기도 하고, 아무도 자세히 안 볼 문장 하나하나도 충분히 다듬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게 꼭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 스스로도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싶을 때도 많습니다. 근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꾸만 손이 움직입니다. 습관인지 고집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 일을 하다 보면 이 점은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남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부분에 지나친 노동력을 투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저 자신도 모두가 이렇게 일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자꾸 하고 싶어져서 남몰래 야근을 하면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셋째, 일을 하다 보면 자꾸 ‘결정권자’보다는 ‘사용자’의 의견에 마음이 갑니다.
현재 제가 하는 일에는 항상 두 종류의 고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간을 만드는 주체인 기업의 의사결정자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에 실제로 머무는 실사용자입니다. B2B 서비스라 의사결정자의 마음에 드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실사용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저도 모르게 그 일에 굉장히 몰두하게 됩니다. 사용자 조사 프로세스가 있는 프로젝트에 더 마음이 끌리고, 조사를 할 때도 꽤나 자세하게 파고드는 편입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으니 보이스업을 시켜서 균형을 맞춰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변화는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시작되어야 해!'라는 식의 신념 같은 게 있는 건지, 그런 건 사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냥 재미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 견해, 감성을 느끼면서 생각지 못했던 답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항상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성향이 제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고, 일을 하다 보면 툭툭 발현되곤 합니다.
현재 맡은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성향이 좋게 작용할 때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 제 역할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다양한 관점으로 일에 접근하고 싶어도, 팀 간 역할의 경계를 지켜야 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다른 팀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가 팀의 업무로 끌어오는 식의 제스처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 단어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 퀄리티를 높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쉽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게 바람직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기업에서 만드는 자료나 콘텐츠는 얕고 빠르게 소비되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만드는 게 별 의미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 사용자의 의견이 아무리 가치 있게 다가와도, 의사결정권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쳐낼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바텀업(bottom-up) 의사소통을 표방하는 기업이 많아지긴 했지만, 실제로 그런 곳은 많지 않으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객에게 나이브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조직 안에서의 역할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마음이 끌리는 방향과는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에 맞춰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해지곤 합니다. 무언가 억눌리는 기분이 들고, 일에 몰입하고 있던 에너지가 툭 끊어지기도 합니다. 이직에 대한 생각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더 과감하게 해 보면서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발산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하고요. 아직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 몇 달간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일할 때 힘이 나고, 어떤 상황에서 에너지가 꺼지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감각을 잘 기억하면서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언젠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을 때 나에게 더 잘 맞는 환경을 고를 수 있지 않을까 - 막연하지만 긍정적인 희망을 가져봅니다.
일은 분명 일차적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저 또한 지금의 직업을 고를 때 그게 첫 번째 기준이었고, 어느 정도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그 이상을 추구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조직이 정해준 역할 안에서만 움직이기보다, 제가 만들 수 있는 흐름을 조금씩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회사에 능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서, 내가 하는 일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제 안에 있는 다양한 성향들—고정된 분야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 다소 비효율적으로 디테일을 챙기는 것,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 단순한 개성에 머무르지 않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재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여러분은 어떨 때 가장 나답게 일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여러분의 재능은, 보다 올바른 쓰임새를 찾아나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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