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교토 여행, 느린 호흡을 불어넣어 준 장소들
짧은 교토 여행, 느린 호흡을 불어넣어 준 장소들
타이틀 이미지 © Unspoken Zine
여러분은 바쁘게 몰두하며 사는 걸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여유롭고 느릿한 편이신가요?
저는 나름대로 여유를 추구하는 편이라 생각했었는데, 본래 성향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요즘 들어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타고나길 어딘가에 에너지를 잘 쏟아붓는 편이라 그 반작용으로 ‘의식적으로’ 여유를 챙기게 됐을 뿐, 여유롭기만 한 생활을 선호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작년 말 TCI라는 성격 검사를 해본 적이 있는데, ‘인내력(Persistence)‘이라는 항목이 굉장히 높게 나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력이란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참을성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끈질기게 붙잡고 해내는 경험”에 매력을 느끼는 성향이라고 해요. 저처럼 인내력 지수가 높은 사람은 지치는 줄 모르고 어떤 일에 몰두해 버리는 일이 잦고, 집중할 만한 일이 딱히 없는 상태에 금방 싫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기질상 한가로운 상태에 머무르는 걸 어려워해서 그런지, 저는 여유롭고 묵직한 기운을 가득 품은 공간을 만나면 묘한 안정감 같은 걸 느낍니다. 의식적으로 여유를 챙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도 모르게 그런 곳을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특히 어떤 일에 강하게 몰두하던 상태에서 그런 장소에 가게 되면, 그동안 몸과 마음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는 것, 숨을 얕고 빠르게 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됩니다. 몸의 감각이 점차 편안해지고, 무언가에 집중하려는 에너지 또한 한결 부드럽고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그런 상태가 되면 에너지를 쏟아서 집중을 유지할 때보다 훨씬 명료하고 선명하게 눈앞의 일에 몰입하게 되기도 합니다.
지난 4월, 일본 여행 중이던 동생과 만나 짧게 교토를 방문했을 때 그런 장소들을 몇 군데 만났었는데요. 아무래도 일본, 특히나 교토에서는 서울에서 찾기 어려운 느린 기운의 장소를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일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각각의 장소에 오래 머무르진 못했지만, ‘그래, 이런 기운이 필요했어.’ 하는 인상적인 감각을 느꼈는데요.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공간들, 한 곳씩 간단하게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티 살롱 & 프라이빗 레스토랑
Farmoon은 이번 여행에서 정말 가장 독특했던 장소입니다. 낮에는 간단한 식사와 함께 티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티 살롱, 밤에는 지인 소개를 통해서만 예약할 수 있는 ‘인비테이션 온리’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는 곳이에요. 벚꽃 명소로도 유명한 교토 철학의 길 북쪽 끝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데요. 식당 근처에도 오래되고 단단한 벚꽃 나무들이 만개해 있어서, 그 앞에서 한참 동안 꽃을 구경한 후에 식당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길을 가다 보면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솔리드한 연회색 외벽에 삼각형 모양으로 살짝 파여 있는 공간 안쪽으로 출입구가 보입니다. 옅게 푸른빛이 도는 도어 프레임 옆에 작게 ‘Farmoon’이라는 사이니지가 보이고요. 출입구 외에는 개구부가 없는 탓에 내부로 들어서면 어둡고 조용한 공간이 펼쳐지는데, 복층으로 뚫린 공간을 통해 2층 창문으로부터 부드럽게 자연광이 새어 들어와 그 빛의 밝음과 존재감이 한결 더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저희는 소개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티 살롱으로 운영되는 낮 시간에 찾아갔습니다. 일찌감치 도착한 덕에 대기 없이 사진에 보이는 동그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죠. 셰프님이 다양한 재료를 창의적으로 쓰는 분이라 메뉴들이 다 생소했지만, 차도 음식도 디저트도, 정말 신선하면서도 퀄리티 높은 맛이었습니다. (다만, 배는 전혀 부르지 않습니다.) 동그란 테이블 뒤쪽으로는 주방이 있는데요. 다이닝 공간과 구분 없이 완전히 오픈되어 있어서, 요리사 분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내내 지켜볼 수 있습니다. 주방 뒤쪽으로 작은 창이 있어서 마치 요리사 분들께 후광 같은 게 비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무드에 맞게, 요리하는 분들 모두 굉장히 차분한 움직임으로 묵직한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는데요. 이런 분위기가 손님들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음식 하나하나를 더 천천히 음미하게 되고, 말 하나 행동 하나도 왠지 더 정성스럽게 하게 되는 느낌이었어요.
이 공간을 운영하는 분은 후나코시 마사요(Funakoshi Masayo)라는 셰프로, 뉴욕의 프랫(Pratt)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후 요리를 업으로 삼게 된 분이라고 합니다. 애초부터 요리뿐 아니라 가구와 공간으로 표현되는 물성에 대한 감각도 남다른 사람이었던 거죠. 이 공간은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을 실물로 구현한 결과물로, 시간과 문화, 습관을 모두 초월하는 이국적인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예술가답게, 주방과 테이블의 길이와 폭을 현장에서 직관적인 감각에 의존해서 정했다고 해요. 공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원형 테이블은 그녀가 꼭 만들고 싶었던 것이라고 하는데요. 원형 테이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안정적인 거리감과 집 같은 분위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역시, 한평생의 걸쳐 여러 분야를 거치며 자신만의 미감과 철학을 다져 온 사람이 기획한 공간은, 짧은 방문에도 진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주소 : 〒606-8285, Kyoto, Sakyo Ward, Kitashirakawa Higashikubotacho 9
인스타그램 : @farmoon_kyoto @masayofunakoshi
카페
두 번째로 소개할 장소는 카페 jete입니다. 주변에 이렇다 할 관광지가 없어서 관광 중에 들르기는 어렵고, 일부러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에요. 저희는 여기저기 걸어 다니던 중 좀 마음 편히 쉴 곳을 서치하다가 사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아 보여서 가게 되었는데요. 카페까지 걸어가는 길이 살짝 지루하긴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오길 잘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카페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끼인 좁고 기다란 건물 1층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작지만 꽤 짙은 색깔을 띤 장소였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뭐랄까, 커피에 조예가 깊은 베테랑 사장님이 몇십 년간 운영해 온 유럽 카페에 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은 2024년에 오픈한 신상 카페인데 말이죠.) 공간의 폭이 좁은데도 층고가 높아서 그런지 전체적인 공간감이 꽤나 시원했습니다. 카페에서는 커피와 간단한 브런치 메뉴를 판매하고 있었어요. 저희는 Farmoon에서 식사를 한 지라 배가 고파서, 각자의 음료와 함께 파스타 1개를 주문했습니다.
여러 장소를 다니다 보면 인상 깊게 아름다운 곳도 있고 컨셉이 참신해서 흥미로운 곳도 있지만, 결국 가장 마음 편하게 머무르게 되는 곳은 ‘신뢰감’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잠깐 밖에 머물지 못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jete도 그런 류의 장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장님에게서도, 조용히 들렀다 가는 손님들에게서도, 이 장소에 대한 애착과 신뢰가 느껴졌던 것 같아요. 집 밖에 나와 활발하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제2의 집처럼 각자 조용히 머무르며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곳곳에 놓인 소품들도 화려하게 눈에 띄진 않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각기 제 자리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품고 있어서 공간 전체에 안정감을 더해주고 있었어요. 저희는 한 시간 남짓 이곳에 머물렀는데요. 짧은 시간 동안 여행 중 이것저것을 눈에 담다가 피로해진 정신이 어쩐지 확 맑아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주소 : 〒606-8314, Kyoto, Sakyo Ward, Yoshidashimoojicho 20-3
인스타그램 : @__jete
잡화점
마지막으로 소개할 장소는 Toribazar라는 편집샵입니다. 교토 교엔 동쪽의 조용한 동네에 있는 작은 잡화점이에요. 가게가 위치한 블록이 세로로 엄청 길어서 꽤 긴 골목을 돌아 돌아 찾아갔던 게 기억이 납니다. 가게가 있는 건물은 도로로부터 살짝 물러나 있어 그 앞으로 자그마한 마당 같은 게 있었습니다. 목재 양개 도어와 그 옆에 나무 덧문이 달린 작은 창문이 얌전하지만 확실하게 가게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었죠. 마치 ‘이곳에 뭔가 있어!’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안으로 들어가니 목재와 아이보리, 네이비 컬러로 꾸며진 차분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이 펼쳐졌습니다. 가게 자체는 작지만 물건 하나하나가 모두 재밌고 귀여워서 구석구석 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실용적이면서도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은 물건들이 많아 보였고요. 교토에서 아무 기념품도 못 산 게 좀 아쉬웠던 터라, 가게 가운데 탁자에 놓여 있던 색유리컵 두 개를 골라서 구매했습니다. 지금도 매일 밥 먹을 때 물컵으로 잘 쓰고 있어요.
Toribazar는 교토의 대표적인 독립 서점으로 유명한 케이분샤의 잡화 코너에서 일하던 분이 따로 열게 된 가게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물건 하나하나의 생김새와 질감을 예민하게 느끼고, 정성스레 셀렉해서 가게를 운영하는 분들을 보면 정말 감탄스럽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작은 물건들의 디테일보다는 공간 단위의 분위기나 조화에 더 예민한 편이라, 이런 감각을 가진 분들을 만나면 ‘이렇게 작은 단위 속에도 엄청난 세계가 있구나…‘ 하고 조금 다른 시선으로 장소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아무래도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들보다는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예쁘면서도 부담 없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물건들이 ‘더 잘 만든 물건’이라 느껴집니다. 물건이란 결국에 잘 쓰이고, 사람 손을 자주 타야 생명력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이렇게 찔끔찔끔 사 모아서 도대체 언제 좋은 물건들로 가득한 집을 꾸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게에 있는 동안은 미래의 내 공간을 상상하며 즐겁게 물건들을 구경했습니다.
주소 : 〒602-0864, Kyoto, Kamigyo Ward, Nakanocho 496
인스타그램 : @torybazar
홈페이지 : https://torybazar.jp/
일본은 가까워서 비교적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와는 꽤 다른 기운의 문화를 품고 있어서 에너지의 흐름을 바꾸고 싶을 때 가기 좋은 여행지인 것 같습니다. 저성장에 접어든 지 오래됐기 때문인지 원래 문화적 기질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일본의 도시는 대체로 서울보다 차분하고 정적입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반응을 요구하기보다는 영역을 존중하는 편이고, 밖으로 표현하는 기운보다는 안으로 가라앉는 기운이 더 강하죠. 서울의 넘치는 에너지에 피로감을 느끼다 일본에 방문하면, 피로가 걷히고 감각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데 최근에 어떤 책을 읽다가, 일본 사람들은 반대로 서울에 와서 일본 도시에 부족했던 활기와 에너지를 얻고 간다는 내용을 보게 됐어요. 일본에만 오래 있다 보면 또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느 도시나 장단점이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여행이 필요한 것이겠죠.
교토에 다녀온 직후부터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또다시 일에 몰두하는 에너지에 잠식당하고 말았지만, 교토에서 머문 짧은 시간은 ‘여행을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욕구를 확실하게 깨워 주웠습니다. 좀 더 길게,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아무렇게나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졌어요. 마음의 방향을 예상치 못한 쪽으로 끌어당기고, 조금은 낯선 방식으로 에너지를 꺼내게 해주는, 다양한 장소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여러분과 합이 좋은 장소는 어떤 기운을 지닌 장소인가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자연스레 세워주는, 좋은 여행지를 찾으실 수 있길 바라봅니다.
참고 링크
Teruhiro Yanagihara Studio _ Farmoon, 2020, Kyoto (2020)
Podium Studio Megazine _ Masayo Funakoshi (2024)
Papersky Japan Stories _ Kyoto Food Lab, Farmoon (2021)
Toribazar 온라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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