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소통 방식을 새로운 직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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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좋아했던 동네입니다. 지금도 주말에 외출을 하고 싶어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파주인 것 같아요. 집에서든 본가에서든 차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 데다가, 넓은 하늘과 한강 뷰가 펼쳐지는 드라이브 길도 리프레시가 됩니다.
파주에는 서점, 카페, 미술관, 영화관까지 즐길 것들이 곳곳에 많은데요. 사람이 많아도 왠지 서울만큼 피곤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문화가 상업보다 우선시되는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문화적 리터러시가 있으면서도 자본에는 물들지 않은 동네 같다고 할까요. 문화가 산업이 되기 이전의 문화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런 파주에서, 최근 좋은 서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제가 자주 가던 카페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지도에서 발견하고는 바로 찾아가 보았죠. 서점의 이름은 사적인 서점입니다.
출판단지 인근에 큰 식당과 카페들이 모여 있는 돌곶이길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근처 주택가 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외쪽지붕이 눈에 띄는 낮은 건물 하나가 있습니다. 서점은 그 건물 지층(건물의 1층과 지하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고 있어요. 풀네임은 아래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한 사람을 위한 사적인 서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직 총 두 번밖에 방문해보지 않은 라이트한 손님이지만, 첫 방문 시의 인상이 워낙에 좋았기에 그때의 느낌과 이 서점만의 고유한 특징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처음 갔을 때는 혼자 방문을 했었는데요. 뭐랄까, 굉장히 편안하게 ‘환영받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직원 분이 대놓고 크게 인사를 하시거나 친절하게 말을 거시는 건 아닌데, 묘하게 공간이 사람들을 반겨주는 느낌이었어요.
독립 서점에 가면 가끔씩 주인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님이 공간 사진 찍는 걸 싫어하시는 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사진만 찍고 책을 안 사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너무 많고, 소중히 가꾼 장소가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이 싫으신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어쨌든 주인이 그런 분위기를 풍기면 손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입니다. 정해진 행동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음이 경직되기도 하죠. 그런데 ‘사적인 서점’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이, 머무르는 시간이 부담 없이 편안했습니다.
공간도 아기자기하게 잘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공간일수록 공간을 살짝 복잡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있어야 다양한 장면이 생기면서 경험에 리듬감이 생길 수 있는데, ‘사적인 서점‘에는 건물 중앙의 작은 중정이 딱 그 역할을 해주고 있었어요. 서점에 들어서면 바로 메인 서가가 나오는데요. 입구 쪽도 유리벽인데 중정 쪽으로도 큰 창이 뚫려 있어서 양쪽으로 빛이 들어왔어요. 창을 통해 틈틈이 보이는 바깥이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주면서도, 반지하라 빛이 과하게 들지 않는 점이 서점이라는 특성과 어울렸죠.
메인 서가에는 입구 쪽 낮은 책장, 벽면의 높은 책장, 가운데 테이블 등에 다양한 방식으로 책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책은 주제별로 묶여 있어서 구경하기가 편했어요. 중정을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그림책과 소설책이 모여 있는 별도의 책장이 있고, 그 앞에는 책을 구매한 손님이 중정을 바라보며 독서를 할 수 있는 작은 휴식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안쪽에는 나무 파티션으로 가려진 숨은 공간이 있었는데요. 마침 제가 방문했을 때 책 처방 상담을 하시던 중이었는지, 그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지, 하고 슬며시 귀를 기울이게 되더라고요.
책 처방이라는 건 사적인 서점 정지혜 대표님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손님과 1:1로 상담을 진행한 다음, 그 사람에게 필요한 책을 직접 처방해 주는 프로그램이죠. 서점의 이름이 ‘한 사람을 위한 사적인 서점’인 이유도, 이 서점의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처방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궁금해져서, 정지혜 대표가 최근에 출간한 책 『꼭 맞는 책』 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어떤 분인지 조금 더 알아보았어요. 정지혜 대표는 출판계에서 편집자, 서점원, 북디렉터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후 2016년부터 스스로 ‘책 처방사’라는 직업을 만들어서 이 일을 해오셨다고 해요. 한 분야에 종사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내 일‘을 정의해 오신 것이죠.
책 처방 상담을 살짝 엿들었을 때, (정지혜 대표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짧은 몇 마디 속에서도 지금 하는 일에 대한 만족감과 자부심이 느껴졌었는데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체계와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를 담아낼 수 있는 거점으로서의 공간을 이렇게 잘 운영하고 있다는 게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책 처방’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책도 자주 읽는 편이고 정신과 상담과 심리 상담 경험도 있어서, ‘상담을 한 이후 그 결과물로 책이 돌아온다’는 게 어떤 경험일지 상상해 볼 수 있었어요.
우리는 일상에서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솔직하고 깊이 있는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기회는 생각보다 찾기 어려워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만나서 내 이야기만 늘어놓기엔 왠지 미안하고, 마음을 무겁게 만들 것 같아 부담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결국 ‘내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늘어놓을 자리’를 허락받기 위해서 정신과나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는 한편으로, 내가 전문가에 의해 ‘치료되고 있다’는 묘한 구조로 인해 생기는 부담이 있어요. 뭔가 개선되어야 하고, 나아져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의사나 상담사가 아닌 서점 주인에게 하고, 그 피드백으로 조언이나 처방전이 아닌 ‘책’을 받는다면 그 경험이 훨씬 가벼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런 공간이 지금껏 없었을까, ‘부담 없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게 이 사회에 정말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손님과 ‘책 처방사’ 사이의 진솔한 대화를 이어주는 매개물이 ‘책’이라는 점도, 그 대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갔지만 그다음 단계의 흐름으로 제삼자인 작가의 이야기를 가져온다면, 깊이 있게 오갔던 대화의 무게감이 환기되고 새로운 관점이 열릴 여지도 생길 테니까요. 또한 이런 과정은 책을 처방하는 사람과 책을 처방받는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을 줄 것 같았습니다. 책을 처방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책을 읽게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책을 처방받아 읽는 사람은 ‘이 안에 내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신뢰와 애착을 갖고 책을 읽게 되겠죠. 두 가지 경험 모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책 추천을 할 때가 종종 있고, 반대로 추천받아서 책을 읽을 때도 있지만, 이런 주고받음이 누군가의 전문적인 ‘직업 활동’으로서, 돈을 받고 공식적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서 경험된다면 확실히 그 깊이가 확실히 다를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저도 상담을 받으러 가 보고 싶어졌죠.
사적인 서점에 첫 번째 방문했을 때는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장류진 작가의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영화 <퍼펙트 라이프>에 나왔던 고다 아야의 에세이 『나무』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가서 제가 살 테니 한 권씩 책을 골라달라고 했어요. 한강 작가의 『빛과 실』, 로마노 과르디니의 『삶과 나이』, 허태임 식물학자의 『숲을 읽는 사람』, 최혜진 에디터의 『에디토리얼 싱킹』, 김민철 카피라이터의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이렇게 다섯 권을 구매하게 됐죠. 책 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다들 비교적 금방 금방 잘 고르더라고요. 사적인 서점에서는 책을 사면 그림이 프린트된 종이로 북커버를 만들어주십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파주에서 샀었지, 하고 기억하게 되어요.
사적인 서점은 공간 자체가 주는 느낌도 좋았지만, 운영자의 가치관을 살펴볼수록 생각이 환기되는 지점이 있었어요. 특히 ‘직업을 직접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죠. 자신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는 누군가의 마음이 하나의 ‘직업’이 되고, 그 직업이 수행되는 ‘장소’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된다는 것이 좋았어요. 이런 사례가 있다는 것만으로 생각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죠. 물론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일을 사업체의 모습으로 꾸려가는 현실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 경험 하나하나가 운영자에게 주는 의미가 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직업으로 삼을 만큼 즐길 수 있는 ‘소통 방식‘은 어떤 형태일까,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고요.
여러분도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조금 더 열린 생각으로 접근해보고 싶다면, 파주 사적인 서점을 들러보는 것을 제안드립니다. 너무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슬쩍 들여다보실 수 있을 거예요.
참고 도서
정지혜. 『꼭 맞는 책』. 유유출판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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