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산책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미 있는 것'을 존중하는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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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는 가도 가도 또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으신가요?
저에게는 특별한 여행지가 한 곳 있습니다. 바로 경상남도 남해예요. 8년 전 처음 갔을 때 한눈에 반했고, 그 이후 일 년에 한두 번씩 꼬박꼬박 찾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남해를 좋아해서, 명절마다 귀성길을 뚫고 연고도 없는 남해에 가서 두세 밤 정도를 보내고 옵니다. 명절마다 찾아가다 보니, 단골이 된 가게의 사장님들은 저희를 가족 같다고 표현해주시기도 해요.
남해 얘기는 앞으로도 종종 하게 될 것 같아, 오늘은 제가 남해를 좋아하는 이유를 간단히만 적어보려 합니다. 제주, 강원도, 구례 등 한국의 다른 지방들도 저마다 매력적이지만, 남해가 주는 기운은 유독 특별합니다. 그 어떤 곳보다도 평화롭고, 하늘도 바다도 너무 잔잔해서, 머물고 있다 보면 마음속 에너지가 한껏 차오릅니다. 신기하게도 그 느낌이 8년째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오가고, 가게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변화 속에서도, 남해 전체를 감싸안는 기운은 한결같이 따사롭고 순수한 생기가 감돕니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남해를 다니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남해 바래길’의 디자인입니다. 남해 바래길이란, 제주 올레길처럼 정해진 코스를 따라 천천히 자연을 둘러볼 수 있는 걷기 여행길이에요. 제가 바래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길 곳곳에서 눈길을 끄는 표식 덕분이었어요. 아래 사진처럼 리본의 형태로 나무나 펜스에 묶여 있어서,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아래 사진은 남해의 동쪽, 물건리 방조어부림에서 본 리본 표식이에요.)
이 표식을 처음 봤을 때 조금 신기했어요. 공공기관이 주도해 만든 디자인일 텐데, 로고나 폰트, 컬러 등에서 젊은 디자이너의 감각이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어딘가에 의뢰를 했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남해답게’ 예쁘다고 할까, 제가 남해에서 느낀 기운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어요. 상업적인 디자인의 향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요. 그래서 왠지 일반적인 디자인 스튜디오가 했을 것 같지도 않은, 묘한 느낌이 들었어요.
한동안 궁금증만 품고 있다가, 이 글을 계기로 최근에서야 조사를 해보았는데요. 우선 이 디자인은 꽤 최근인 2020년에 이루어진 작업이었습니다. 남해 바래길은 개통 10주년이었던 2020년에 ‘남해관광문화재단’ 주도 아래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다고 해요. ‘남해 바래길 2.0’이라는 이름의 사업으로, 노선 전체를 정비·확장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더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개편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 과정에는 로고와 사인 등을 포함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수립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디자인을 누가 했을까. 처음엔 알아내기가 꽤나 어려웠어요. 여러 자료를 보았는데 디자인을 개발했다는 언급만 있고 그 용역을 누가 수행했는지는 명확히 쓰여 있지 않았죠. 바래길팀 내부에 디자이너가 있었던 건지, 외주 업체가 저작권을 남해군에 넘겨서 이름이 노출되지 않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동생의 도움으로 ‘양애진‘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남해 시대‘라는 지역 언론 사이트에 남해 바래길 디자인의 실무 책임자로 ‘양애진 팀장’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죠.
남해바래길 2.0 | 일관된 디자인 체계와 정보제공 시스템
중장거리 탐방로로 변신한 바래길의 효과적인 운영관리와 홍보마케팅을 위해서는 브랜딩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바래길2.0은 새로운 디자인 정체성 구축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로고부터 안내사인 디자인까지 모든 것을 대대적으로 고도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남해바래길사람들에서 `바래길 새 로고 심의위원회`까지 별도로 구성하여 다양한 의견을 받아 30개 가까운 바래길 후보 로고 중에서 유력후보를 선정했다. 유력후보 로고를 다시 여러 차례 의견수렴과 수정작업을 거친 끝에 현재의 바래길2.0 로고가 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발군의 감각과 실력을 갖춘 양애진 팀장이 디자인 실무책임자로 각고의 노력을 해주었고, 그 결과 대단히 세련되고, 감각적인 `남해바래길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10월 중순 완결되었다. 바래길2.0은 앞으로 새로운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기반으로 조금씩 더 예쁘고 효율적으로 변신해 나갈 것이다.
출처 | 남해시대, 「231km, 시범개통 초읽기에 들어가다」, 2020.11.10.
이후 저는 양애진 씨의 브런치 계정을 발견했고, <시골 스타트업 창업기>라는 브런치북을 통해 남해 바래길 디자인 작업의 맥락을 조금 더 알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양애진 씨는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었고, 작업 당시에도 전업 디자이너가 아니라 ‘팜프라촌‘이라는 스타트업의 멤버였다고 해요. (주된 역할은 디자인과 마케팅이었지만요.) 남해 바래길 디자인 가이드라인 개발은, 남해에서 스타트업 운영을 하던 중 바래길 팀에서 제안이 들어와 곁다리로 하게 된 일인 듯했어요.
글을 읽으면서, 의외로 작업 과정에서 많은 고민과 고충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본인이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 스튜디오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다는 점 때문에 일하는 방식에서 확신을 얻기 어려우셨던 것 같았습니다.
지난 4월, 팜프라에 잠시 방문한 바래길 탐방센터 팀장님이 불쑥 제안을 했다. 남해 바래길을 이번에 리뉴얼하는데 로고를 비롯한 전반적인 디자인 가이드라인 개발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남해 바래길은 제주 올레길처럼 남해를 두르는 걷는 길이다) 팜프라만 생각하던 차에 정신을 환기할 수 있는 신선하고도 재밌는 일이었다.
(중략)
하지만.. 바래길 로고 작업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찾아왔던 감정은 ‘자괴감’이었다. 스스로의 역량에 다시 한번 장벽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게 비전공자인 나는 그저 순간순간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해가고 있을 뿐, 이를 실제 업계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개념조차 몰랐다. 나는 디자인만 했을 뿐이지 전체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결과를 측정하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다. 애초에 전략이 없었다. 매일을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문제 해결로서의 디자인을 하고 있는가? 단순히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운 디자인은 아닌가? 바래길을 이렇게 디자인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여기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가치와 철학은?'
전문성이라는 것에 대한 갈망이 더 커져만 갔다. 도시의, 서울의 다른 스튜디오들은 어떻게 작업을 할지 궁금했다.
출처 | 「시골 스타트업 창업기」 05. 2020년의 역량과 수익모델, 양애진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남해 바래길 같은 디자인이 서울에서 흔히 보는 디자인보다 더 좋습니다. 요즘 도시에서 마주치는 디자인들은 수준 자체는 매우 높지만,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어떤 대상을 ‘포장’하는 디자인이 대부분이에요. 물론 남해 바래길 또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탐방객 수를 늘리겠다는 취지는 유사할지 모르지만 디자인 결과물을 보면 남해를 ‘포장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남해가 이미 품고 있는 좋은 기운을 디자이너의 힘으로 고스란히 ‘전달’ 또는 ‘번역’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젊은 감각이 느껴지는 세련된 시각적 언어로 다듬어져 있지만, 그 어디에도 ‘남해스럽지 않은 것’은 섞여들지 않았습니다. 오랜 정체성을 전달하면서도 신선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 이런 게 좋은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남해 바래길 디자인이 구현된 과정을 엿보며, 디자인이 과연 전공자들만의 고유한 영역일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으면 업계의 업무 체계나 전문 용어들을 익히기 어렵고, 동종업계에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지인도 부족하니 성장이 더딜 수도 있습니다. 업계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가늠할 수 없으니 전문가로서의 자신감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고요. 그런데 그 ‘프로페셔널함‘이라는 것이 세상 모든 일에 있어서 늘 최우선의 가치일까요? 세상엔 많은 일이 있고, 어쩌면 그중 어떤 종류의 일은 경험치나 숙련도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더 중요한 자질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뭐라 정의하긴 어렵지만, 바로 그 ‘무언가’가 저로 하여금 이 디자인에 관심을 갖도록 한 것일 테고요.
좋은 디자인(Design)이란 건 무엇일까.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저 또한 늘 마음속에 조용히 품고 있는 질문입니다. 디자인의 본질이 시각적 결과물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 언어를 매개로 소중한 가치를 보존하거나 연결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디자이너’라는 사회적 직함을 포기하더라도 그 본질을 쫓아가보고 싶기도 해요. 양애진 씨는 코로나 이후 남해를 떠나서 서울로 돌아와 프리워커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데요. 여전히 자신을 특정 직무에 가두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관심사를 확장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재능을 하나 발견해도, 그 안에 갇히지 않고 그 재능을 수단 삼아 계속 세상을 넓혀가는 것 같아 멋져 보였어요.
돌아오는 설 연휴에도 어김없이 남해를 방문할 예정인데요. 이번에도 남해의 특별함을 자신이 가진 재능을 통해 지키고 이어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좋은 디자인에 대해 계속 고민해보려 합니다.
참고 링크
남해 바래길 홈페이지
<브런치북 : 시골 스타트업 창업기>, 양애진
<231km 시범개통 초읽기에 들어가다> (남해시대, 2020.11)
팜프라촌 - 판타지 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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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단골 게스트하우스 '생각의 계절' 사장님들께서 바래길을 완보하시고 배지를 모두 받으셨다고 해요.
배지 실물을 보고 싶다는 요청에 흔쾌히 구경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진도 함께 올려보아요.
© Unspoken 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