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긍지의 날」
나는 내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무겁다
한동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마음으로 지냈다. 왜, 설화 속 이무기는 용이 되기 직전에 인간의 방해를 받아 승천에 실패하고는 한을 품지 않나. 당신이 나를 뱀이라고 말해 버려서 부정이 탔다거나 또는 당신이 승천하는 나를 목격하는 바람에 결국 주저앉았다고 원망하며 말이다.
계획한 일이 하나하나 어그러질 때마다 그간 방해받았던 일이 하나둘씩 떠올라 아쉬웠다. 1년에 한 번 지원할 기회가 주어지는 출판인 양성 교육과정에 지원 서류를 접수한 후가 특히 그랬다. 넉넉한 마감 기한을 믿고 여유를 부리다가 큰 실수를 고치지 못한 채 부랴부랴 서류를 제출하고는, '아버지가 갑자기 입원하지 않으셨다면…, 어머니가 애먼 내게 화를 풀어 내가 서류 제출 직전에 흥분하지 않았다면….' 싶었다.
필기시험의 매서움을 체험하고 나서야 원망은 사라졌다. 이미 서류시험을 통과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외부 상황이 이랬으나 저랬으나 일단 내 공부가 부족했다고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그간 원망이 내 책임을 가볍게 하는 동시에 어떠한 노력도 하지 못하게 짓누르고 있었구나 싶었다.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겸사겸사 공원에 들렀다. 만개한 자두나무를 보다가 문득 김수영의 「긍지의 날」이 떠올랐다. 꽃이 핀 풍경에서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란 구절을 떠올렸기 때문인가 싶었는데 시 전문을 다시 읽으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기시험을 치르고 느꼈던 후련함의 의미를 「긍지의 날」에서 찾을 수 있었다.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加)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1955년 2월
― 『김수영 전집 1 : 시』(2003), 민음사
궁지에 날 세우는 긍지
이 '긍지의 날'은 많은 이에게 당당히 내세울 만한 일을 완수한 날 같지 않다.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이라지만 아직도 "나의 최종점은 긍지"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심지어 무언가에 부닥치다 산산이 깨지는 날인 것 같다. '나'를 서럽게 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날이지만 화자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라고 되뇐다. 서러움 속에서도 그는 절망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는 비애"(「비」)다. 일상의 관성에 날 세우기 위해 주변 소리를 지울 만큼 요동치는 파도가 되고, 더 이상 스며들지 않고 흐르는 빗물이 된다. 파도가 파도를 만들고, 빗물이 빗물이 밀어내는 자기 극복의 움직임은 원천이자 최종점이 되어 끊임없이 순환한다.
'완수'가 아니라 '움직임'일뿐인 이 긍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화자 스스로 "순환의 원리"를 너무나 잘 알고 감행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 쓰는 사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 책 만드는 사람에게서 이런 긍지를 자주 보았다. 무언가 한계에 부닥쳐서 서럽지만, 자신이 믿는 아름다움은 그 자기 극복에 있다고 스스로 알고 있다. 설움을 극복하려 할수록 설움을 좇는 꼴이기에 영원히 서러울지도 모른다고 예감한다. 어려움을 알고도 자신을 궁지에 보내는 인식과 결단에서 긍지는 자란다.
나의 몸이 항상 약 3.03 센티미터 더 자랄 해석
"그리하여 /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이란 긍지는 경우에 따라 기만적일지도 모른다. 피로와 설움이 어떻게 오롯이 나만 만든 것이겠는가. 가령 공익 제보를 해서 곤란을 겪는 사람을 두고 사회가 '스스로 피곤한 일을 한 사람'으로만 치부한다면, 그것은 공익 제보자를 보호할 사회의 책임을 은폐하는 논리다.
그러나 개인의 차원에서 당사자가 '스스로 피곤한 일을 한 사람'임을 견딜 수 없다면 설움을 빚는 일을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시작한다 한들 원망에 빠져 널브러지지 않을까. "영원히 피로할 것"을 강인하게 긍정해낼 수 없다면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달나라의 장난」)은 견딜 수 없다.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신성한 거짓말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만개한 자두나무를 두고 누군가는 봄의 기온과 광주기가 개화 호르몬 분비를 자극하는 등의 자연법칙에 의해 '피워진 것'으로 설명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물같이 엷은 날개를 펴며 / 너의 무게를 안고 날아가려는 듯" "죽음 위에 죽음 위에 죽음을 계속하"(「구라 중화」)는 꽃을 '피워 낸' 이미지를 찾을 것이다. 동일한 사태를 두고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자두나무에게 의지가 있다면 한 치가 더 자라고 싶은 태도는 후자의 해석이 아닐까. 부딪히는 것보다 부딪치는 게 차라리 낫다.
필기시험을 치른 후 자두나무 앞에서 실제로 느꼈던 내 후련함은 한없이 일상적이다. 참 드물게도 내가 치르고 싶어서 받은 시험이었고,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은 다했으니 미련이 없겠다는 것. 어려운 만큼 어떤 점이 스스로 부족했는지 확인했으니 의미 있는 시험이었다는 것. 떨어질 것 같아도 여전히 다음 전형인 면접을 준비하고 싶다는 것. 김수영의 긍지를 마주하며 내가 느꼈던 후련함의 의미를 찾았지만 사실 비교할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도 김수영처럼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라도 믿고 싶고, 믿어야 한다.
* 브런치를 찾지 않은지 한 달이 훌쩍 넘었네요.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할 것 다하고 산' 걸 생각하면
그저 글을 읽고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여유를 더 채워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