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보다 '언제'라는 질문

계절과 우울이 만들어준 어느 사진에 대해

by 북태평양

최근 3년 남짓 공들여 찍은 사진이 있다.(나도 다른 사진가들처럼 언젠가 그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공들였다기보다는 그저 잊지 않고 기회가 되면 종종 찾아가서 찍은 사진들이다. 내용과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먼저 드러나지 않고 느낌이 먼저 마음에 바람을 일으키기를 바란다. 그런 기대를 품고 만든 사진 들일뿐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아직 알기 어렵다. 그냥 기분이 달라지고 바람이 일고 이건 뭔가 하는 궁금증이, 그러나 꼭 그것을 알아야 되는 절박함은 없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진이고 나와의 관계가 형성되는 이입의 순간을 기대하고 내놓는 사진이 되었다. 그렇게 이번만큼은 사진에 말이 많아졌다. 이 사진을 보고 좋다는 감정을 일단 받아 일으킨 사람들의 첫 질문은 거의 "와! 이거 어디예요?"다. 나는 누군가는 이거 '언제'냐고 물어보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단 한 사람도 그렇게 질문해온 적은 없다. 시간에 관심을 가지려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고 몸으로 받아들이고 곱씹어보아야 떠오를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기대는 하고 있다. 누군가, "이건 언제인가요?"라고 물어온다면 난 그 사진을 그에게 그냥 가져가라고 줘버릴지 모른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이미 늦었다고 말해둬야 사진의 안위가 보장될 것이긴 하다. 어쨌든 사진을 보자마자 어떤 감정을 일으킨 사람에게 그 장소를 말해버리면 공중에 떠 있는 감정의 발목을 잡아끌어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즘 말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다. 장소 그 자체가 아니라 장소라는 구체적 정보가 관심을 끌어버리면 그 사진은 하나의 사실로서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다. 감정이 충분히(?) 무르익고 시간이 일으키는 감정이라는 잡히지 않는 부유물에 대해 받아들인 뒤, 여러 가지 쌓인 이야기들 중 하나에 불과한 '장소'라는 팩트를 받아들여도 괜찮은 즈음이 된다면 그때 그것이 어디라고 말해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이라는 것이 그저 객관적 순간에 대한 기록일 뿐이라 본다면 이는 참 까다로운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그 사실성에 대한 기대와 신뢰로 얻는 이득이 절대적이지만 그 때문에 넘지 못하는 장벽도 높다. 일단 관객들은 의미나 사실의 내용에 관심을 두게 마련이다. 사진의 특징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그 내용보다는 보이는 그 자체가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그 '뭔가'(느낌이라 해두자)에 집중하고 내면의 변화를 관찰해보는 순간은 없는 걸까 하는 아쉬운 느낌을 갖기도 한다. 왜 없겠는가. 그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거나 드러내기 어려울 뿐이다. 즉 우리는 말로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다면 그 실체는 없는 것으로 생각해버린다. 실체라는 몸을 지니지 않은 세상의 사실과 관계들은 참으로 넓고 깊은데 말이다.


그 사진을 말하자면 이렇다. 우연히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지고 서늘해질 대로 서늘해진 정신(사람들은 이것을 우울이라 말하기도 한다)으로 집에서 멀지 않은 길을 걷다가 발견한 나무 한 그루 아래에 빗물이 고여 있었고, 그 위에 멀리서 바람에 날려온 포플러 낙엽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물에는 작고 앙상한 늦가을 느티나무가 비치고 있었고 낙엽은 흡사 나무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다 바람에 떨어져 날아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마음에 흥건하게 쌓인 우수가 시야를 흐리게 해 줬기 때문에 그리 보였을 것이다. 당시 그 모습이 내 눈에 선명하고 분명한 사실의 장면으로 보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다. 울적하고 흐린 시야는 다른 것을 보게 했다. 카메라도 없어서 한 달 전에 바꾼 국산 스마트폰으로 사진 딱 한 장을 선 자리에서 찍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내 깊은 고민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난 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 그 사진을 열어 화면으로 보니 평면화된 한순간의 이미지가 주는 느낌은 좀 달랐다. 사진의 위아래를 뒤집어 봤다. 물에 비친 나무는 실제(비친 것도 실제다. 말의 어폐다.)처럼 보였고 낙엽은 하늘을 날고 있었고 사진에서는 바람이 불었다. 아래위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위는 아마도 중력의 반대 방향일 것이다. 중력이 지각에 미치는 영향이 아래와 위의 개념일 것이다. 나무는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자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력이 있어서 나무는 그 방향으로 자랄 것이고 사람도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서고 걸을 것이다. 당연하고 세세한 사실들에 집착하는 것은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생각이나 행동의 범위가 딱 거기까지일 때 가능한 일이다. 사진에 있어 아래위와 좌우 수평에 대해 지각하고 말하는 데 가장 큰 요소는 중력이었다. 세상의 한 순간을 담아내는 사진의 일이 중력에 좌우될 필요는 없다. 중력보다는 지각의 방향이 바탕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사진이 중력으로 대표되는 물리적 사실에 지배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그 속에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다. 사진 한 장 뒤집어 놓고 만지작거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시간을 또 허비했다.


비가 온 뒤면 여전히 그곳에는 신발에 물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야트막하게 물이 고였고 그 위에 나무가 비쳤다. 물은 하루 이틀 만에 빠졌고 햇볕 좋은 날에는 반나절도 안 가서 증발하거나 바닥 틈새로 스며들어 버리고 콘크리트 바닥이 드러났다. 비 온 뒤 가끔 그곳을 지나면 잠시 바닥을 바라보다 지나가고 어떤 때는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카메라가 있을 때는 카메라로 찍었고 없을 때는 처음 그 나무 사진을 찍었던 핸드폰으로 찍었다. 나무 만이 아니라 나무를 둘러싼 계절과 바람과 쓸쓸함 같은 것들도 함께 찍히는 듯했다. 다음 해 늦가을, 첫 사진을 찍은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곳에 고인 물에 느티나무 낙엽과 포플러 낙엽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날은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 없었고 햇빛이 좋았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있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어깨를 스칠 듯 지나가면서 나무 아래에 내려앉았다. 마침 들고 있던 카메라로 그 날렵한 착륙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고도를 낮추는 비둘기의 욕심 없는 날갯짓만이 움직이는 현재였다. 물속 낙엽이나 물에 비친 나무는 과거에서 온 듯했다. 하늘도 구름도 그랬다.


1년 전 뒤집어 놓은 사진을 위에 두고 1년 뒤의 사진을 아래에 가져다 붙여서 한 그루의 나무를 만들어 보았다. 현실에서는 없는 물에 비친 나무 한 그루가 만들어졌다. 찍는 순간 이미 과거가 돼버린 지나간 시간들을 만나게 하고, 만난 적 없는 두 시간의 반영(反影)으로 나무 한 그루를 만들었다. 사실 시간은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지나갔을 뿐인 두 시간의 단면을 사진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포토샵으로 붙였다는 이야기다. 위로 날아가는 낙엽들과 아래로 내려앉기 위해 날고 있는 비둘기가 사진 속에 바람을 일으켰다. 아니 바람을 일으키기를 바랐다. 비현실이 현실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었을까. 느티나무는 왜소하고 앙상했지만 완성된 사진으로서 시간이 지나가면서 휙 하고 일으킨 척박한 바람을 품은 듯했다. 그렇지만 의미와 상징보다는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쯤 있을 것 같은 나무, 바람을 품은 나무 한 그루로 보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그리고 3년 남짓 찍어둔 사진들을 아래 위로 짝지어서 새로운 나무인지 시간인지를 만들어 보았다. 만들기에 따라서 열 그루 스무 그루도 만들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허구도 허구인 줄 알지만 빠져들 수 있는 시각적 개연성 정도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개연성의 기준이나 경계를 어디쯤으로 둘지는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완전히 어긋나거나 눈에 띌 정도로 쉽게 드러나는 허구가 예술의 알리바이로 용인되기에 충분한 아우라를 지닌다면 얼마든지 비사실적으로 보여도 괜찮을 것이다.

Mirror of Gravity #1, 2018~2019


어느 사진은 그 속의 시차가 1년이 넘기도 하고 어떤 것은 2년이 다 되기도 한다. 연초와 연말이 함께 있는 사진도 있고 어떤 사진은 같은 날 시차가 10분도 안 되는 사진도 있다. 그날은 바람이 불다가 그치고 비가 그쳤다가 또 오고 했다. 나무는 의연해도 물에 비친 나무는 흔들리고 사라지고 드러나고 했다. 몇 분의 시차가 몇 년처럼 보이기도 하는 시각의 아이러니다. 인간의 지각 혹은 인식 속에서의 시차와 보이는 것의 시간 감각은 다르고 모호하다. '언제'는 많은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질문이다. 여기서는 횡적 넓이보다 종적 깊이에 훨씬 더 많은 확장의 여지가 있다. 어느 순간을 말할 수도 있고 어떤 기간이 될 수도 있고 몇 개의 시간일 수도 있고 그 간격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다. 한 그루 나무에 작용하는 중력의 아래위, 시간의 방향으로서의 아래위, 개념의 늪에 빠져서 허송세월 할 생각은 없다. 그냥 '언제'라는 포괄적 의문사 하나만 화두로 남겨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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