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위안

by 북태평양

예술로 위안을 받는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부피의 예술, 길이로서 시간의 예술이 하는 일이 일차적으로 크다.


마음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소리나 영상처럼 잠시 이곳을 잊게 해주는 것. 그림이나 사진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지만 음악만큼의 부피를 갖기 어렵다. 음악은 사람의 의식이 음악 소리와 함께 진행되는 경로를 나란히 걸어가는 길이로서의 여정이 있는데 외형적으로는 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뿐인 그림과 사진 예술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머물고 질문하며 느끼는 성의가 필요하다. 이미지 위의 시간은 관객이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마다 감동의 부피가 다른 것이다. 물론 음악도 관객의 성의가 완성의 큰 부분이긴 하지만 소리가 데려다주는 길이 있어서 그 위를 걸어가거나 떠다닐 수 있다. 다만 어떤 형식이나 장르가 더 사람의 위안과 행복의 효과가 큰가 하는 비교나 분석은 부질없는 일이다. 까닭 모를 슬픔이나 슬픔의 성정을 한 모종의 심적 격랑 같은 것들이 어떻게 사람을 위로하는지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아, 좋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알 수 없는 그 무엇들 중에는 그보다 짙고 모호하고 아득한 정념 같은 모종의 감정들이 고달픈 현실을 위로할 때가 있지만 이유를 말하기 어렵다.


P20150513_153645010_88270921-956D-48B4-9828-622F3C18896A.jpg ⓒ북태평양


소리에도 '슬프다'거나 '발랄하다'거나 아름답거나 처연하거나 하는 감정이 있다. 소리 자체에 감정이 있다기보다는 사람이 듣고 느끼는 감정이 소리의 감정이 되고 그 감정은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한다. 감정도 얼굴처럼 세월과 걸어온 길이 그 속에 있다. 소리에 있어서는 '슬픈'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복잡 변화하는 전개와 극적인 구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의 취향도 어떤 성향의 감정을 품은 소리를 일관되게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 각자의 느낌도 천차만별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규정할 수도 없고 분류할 수도 없는 취향이나 감정의 문제를 정형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감정은 말과 말이 아닌 모든 언어의 전달체 이면서 마음속에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필기구 같은 것이다. 감정은 언어의 바깥에서 모든 언어와 감각을 연결하는 조직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도 포함된다.


종종 힘겨웠던 시절에 그 노래 한 곡 덕분에 고비를 넘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래는 감정을 지닌 소리와 노랫말로서 직접 그 길이만큼의 시간 동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좋은 노래는 노래 자체로 마음에 닿는 것이다. 잠시 여기가 아닌 어디든 데려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감정의 휴식은 행복감만큼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이다. 노래가 끝난 뒤 사람들은 다시 뭔가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일시적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싶은 것이라도 큰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음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종종 소용없는 일이기도 하다.


음악이라는 소리를 접한 내 감정이 반응하고 몸에 나타나는 변화(기분이라 불러도 좋다)를 거울삼아 그 반대편의 일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술을 포함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이 세상에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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